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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42_ 교회 포기한 군대
Divi Ambrosii Episcopi Mediolanensis Omnia Opera 교회 포위한 군대 이상한 것을 이상하다고 말하면 안디는 이상한 세상이 됐다. 그래서 바름을 이야기한다고 뒤집어 이야기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덩달아 그것을 듣는 사람도 수를 더해 가고 있다. 거꾸로 사는 세상이니, 막 쪄낸 찐빵이니, 베 짜는 하나님이니 하는 변설로 진리를 낯설게 만든다. 신학교를 들어 간 사람이 갑자기 목사 될 필요성을 못 느껴 신학교를 그만두었단다. 그리고 믿음대로 살기 위해 바로 살아야 될 세상을 거꾸로 살아야 된단다. 어느 넋이 빠진 친구는 목사 안수를 받은 날 가슴이 하도 허전해 실컷 술로 채웠단다. 이따위 수작의 대가는 역시 니체였다. 그가 얼빠진 눈망울로 종종 되뇌인 말이 선한 악이니 악한 선이니였다. 성경은 말씀하신다. 악은 악이고, 선은 선이라고. 성경에서는 의적 일지매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도둑은 도둑이고 의인은 의인이다. 어찌 의로운 도둑이 있을 수 있으며 악한 의인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암브로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세상의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었다. 많고 강한 게 판단의 가름끈이 되고 있었다. 신자들마저도 그 수가 늘어감에 따라 성경이 아니라 세상 풍조를 따르는 경향이 짙어졌다. 니케아 신앙을 지지하는 암브로스는 아리우스파에 대한 어떤 지원도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성경대로 ‘예’와 ‘아니오’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그가 유스티나 황후의 부탁을 거절한 까닭은 솔직히 아리우스주의가 그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아리우스주의가 고트족의 신앙이었기 때문이다. 고트족은 아리우스파가 로마 제국에서 온갖 힘을 다 쓰던 시절에 파송한 선교사들이 개종시킨 야만인들이었다. 그 후 로마 제국의 대부분이 니케아 신앙을 받아들였다. 반면에 이성과 논리에 근거해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아리우스주의는 야만인들에게 전파됐다. 그 결과 아리우스주의자는 미개인이나 야만인을 의미하게 됐고 니케아주의자는 로마인을 뜻했다. 황후는 여타 야만인들로부터 로마 제국을 방어하기 위해 야만인들을 용병으로 고용하고 있었다. 아리우스 신앙을 지닌 이를 야만인 병사들을 위해 그녀는 밀란에다 예배당을 하나 마련해주고 싶었다. 암브로스는 딱 잘라 거절했고 그녀가 바랬던 교회를 그를 따르는 사람들로 채워버렸다. 화가 치밀 대로 치민 황후는 야만인 군대를 보내 그 교회를 포위하게 했다. 군인들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면서 암브로스는 신자들에게 자신이 작곡한 찬송가를 부르도록 가르쳤다. 사실상 암브로스는 라틴 찬송가의 아버지로 불리운다. 병사들은 살기를 번득이며 공격 명령을 기다렸다. 온 밀란 시민이 숨을 죽이며 사태를 주시했다. 싸움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유스티나 황후는 지휘봉을 손에 쥐고 교회 정문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암브로스 ‘네까짓 게 버텨봤자 별수 있겠어. 이제 무릎을 꿇을 거야’ 하며 그녀는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녀는 짐짓 일그러뜨린 얼굴에 묘한 웃음까지 짓고 있었다. 그때 숨 막히는 정적을 깨고 교회에서 찬송을 부르는 회중의 힘찬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아연했다. 어찌됐던 그녀도 신자였다. 황후는 찬송부르는 회중에게 공격 명령을 내릴 심장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암브로스가 이겼다. 2021-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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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32 - 쳇바퀴 세상
Sylvester I and Constantine 쳇바퀴 세상 신문을 펼쳐 든다. 날마다 그렇듯 오늘도 사건으로 지면은 그득하다. 10대 소녀가 괴성을 지르다 밟히고 밟혀 눈이 개개풀어진 사건, 미국 대통령 예비선거, 이주일 귀국, 다리 저는 국회의원이 목욕하고 나오다 칼 맞은 일, 이북에서 올까 싶은 목사들 이야기, 이스라엘 레바논 폭격으로 악명 높은 헤즈볼라의 책임자 무사위가 콩가루 된 사건. 주후 325년에 신문이 있었다면 콘스탄틴 황제가 주최한 니케아 총회를 대서특필했으리라. 한국전쟁 참전을 결의한 유엔총회에 비교가 안 되게 신문지면을 꽉 채웠을 것이다. 이런 소식이 공해로 하늘에 구멍 뚫리는 기사나 국회의원 선거 시사 나부랭이보다 얼마나 좋을 것인가. 어제와 같은 하루의 일과가 시작됐다.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틴은 기지개를 펴며 침소에서 일어났다. 햇살은 밝았다. 만찬 석상에서 박해 때 눈이 뽑혀 애꾸가 된 감독의 눈 자국에 입맞춤했던 정경이 떠올랐다. 만찬장에 감동의 박수가 넘쳤다. 황제는 빙긋 웃음을 흘렸다. 니케아 총회가 파한 뒤 총대들이 콘스탄틴에게 활동결과를 보고했다. 그러나 연로한 아리우스를 비롯한 다섯 총대들은 니케아 신조에 서명을 거부했고 유배를 당했다. 이게 난관을 전부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그리스도와 성부의 관계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토의는 해를 거듭해 한 시대를 넘어 계속됐다. 추방당했던 감독들이 의기양양하게 돌아왔고 반대로 아다나시우스가 유배당했다. 인생은 죽기 마련이다. 세월이 흘러 임종 무렵에 세례를 받은 콘스탄틴 황제가 숨을 거뒀다. 세 아들이 뒤를 이었다. 고구려의 독재자 연개소문이 죽은 뒤 일어났던 꼴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이미 오래 전에 본을 보이고 있었다. 황제의 아들들은 황제 자리를 놓고 아귀다툼을 했다. 어렸을 때 그리도 친했던 형제들이었는데 권력 앞에서는 모두가 철천지원수였다. 역사를 보노라면 지금의 사태는 아무 것도 아님을 느끼게 된다. 그에 곁들여 아리우스파와 니케아파의 팽팽한 신념들이 이방원의 넋두리마냥 칡넝쿨처럼 얼키고 설켜 맴돌았다. 승리한 쪽이 반대파의 감독들을 유배시켰다. 심지어는 기독교 신자끼리의 싸움을 종식시키고자 콘스탄틴(세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알렉산드리아에 파송했던 연로한 메신저도 유배를 당했다. 유배당한 사람은 세 아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항의를 전달했다. “나는 당신 할아버지 치하에서 박해를 받았습니다(콘스탄틴 황제의 아버지는 디오클레티안 치하 때 부황제들 가운데 하나였다). 당신이 날 박해하려고 한다면 진리를 부인하기보다는 박해를 달게 받을 것이오. 하지만 이건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당신에게는 제국을 주고 우리에게는 교회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셨음을 말이오. 우리가 정권을 탈취한다면 그건 우리가 하나님을 반대하는 게 될게요. 그러나 당신이 교회에 간섭하신다면 당신은 보통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이 말은 니케아파의 지도자가 아리우스파 황제에 대항해 말했다. 드디어 니케아파가 완전히 승리하는 날이 왔다. 더 이상 그런 소모성의 싸움들을 방지하기를 바라는 황제들이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칙령을 발했다. 2020-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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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세계 교회사 31 - 니케아 신조
니케아 신조 아마 직전 총회장이셨던 것 같다. 그는 두루마기 차림의 설교 중에 찬송가를 자작하여 부르시는 목사님이셨다. 우리 교단 가장 큰 교회의 목사님이시기도 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총회장이셨다. 그가 이제 바로 뒤를 이은 총회장한테 나무망치와 받침을 물려주고 증경 총회장이 되어 바깥으로 나오셨다. 몇 분 총대 목사님이 이 증경 총회장과 맞닥뜨렸다. 그들의 만남과 대화는 여느 청년들이 모여 노닥거리는 모양과 진배없었다. 햇병아리 신학생의 눈에는 진기한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거기에는 진솔한 인간의 모습이 우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요즘의 세태처럼 권력과 부귀와 장수 나부랭이보다는 지혜를 하나님께 구한 솔로몬 왕이 이렇게 말했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 그런데 주 후 325년 니케아에서 인간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 발생했다. 다시 말해 해 아래 새로운 일이 일어났다. 바벨탑 이래 인간들이 모이면 쓰잘 데 없는 일을 일삼기 일쑤인데 니케아 총회에서는 전혀 달랐다. 인간들이 웅성웅성 모여 인류 최초로 신에 대한 협의와 결정을 내렸다. 니케아 총회는 부활절 날짜를 결정했다. 부활절은 봄이 시작되고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 이후 첫 번째 보름달이 지난 첫 번째 주일로 결정했다.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과 그리스도인의 관습이 짬뽕 된 것이었다. 의견이 분분했던 부활절이 확정됐다. 이어서 니케아 총회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논란도 종지부를 딱 찍었다. 이것은 아다나시우스의 의견을 따라서 결정되었다. 이로써 아리우스의 해괴한 주장은 빛을 잃고 불가사의한 삼위일체는 번쩍거리게 되었다. 이 내용을 담은 걸 니케아 신앙고백이라고 한다. 물론 이 신조가 몇 년 뒤에 작성되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니케아 신앙고백이라고 하는 것은 그게 니케아 총회의 사상을 참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게 영국 공동기도서에 번역되어있는 걸 한글로 옮기면 이렇다. “나는 하늘과 땅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만물의 창조주 전능하신 한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독생 성자이시며 만세 전에 성부와 함께 계셨고 하나님의 하나님, 빛의 빛이시며 참되신 하나님의 참되신 하나님이신, 나셨지만 만들어지지 않으셨고, 성부와 한 속성을 지니셨고, 만물을 만드셨고, 우리 인간을 위해 우리 구원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그리고 동정녀 마리아의 성령을 통해서 인간이 되신 한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예수님은 본디오빌라도 치하에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고난을 받으사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예수님은 성경 말씀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오르사 성부 오른쪽에 앉아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입니다.나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 생명의 주와 수여자이신 성령님을 믿습니다.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며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2020-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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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세계 교회사 30 - 니케아 총회
니케아 총회 고풍스런 대전중앙교회에 모인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의 모습은 엄숙하고 경건했다. 우리 총신 신학생들은 총대들 틈에 뒤섞이니 이제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 꼴이었다. 그렇게 높게 보이던 신학부 졸업반 전도사님들도 어설퍼 보이기는 매한가지였다. 한 목사님이 손을 쳐들고 “의자앙!”하며 사회 석 앞으로 어기적 나갔다. 마이크를 손에 쥐고 발언을 했다. “에, 우리가 이렇게 성 총회로 모였으니 어찌 입씨름만 한 대서야 하나님 앞에 면목이 서겠습니까? 낮에는 회의를 하고 밤에는 부흥사경회를 열어 은혜를 받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동의가 들어오고 왁자하니 재청이 울리고 가부를 묻는 소리가 찌렁하니 예배당을 휘감았다. 기름 부음 받는 자들의 “예”하는 소리가 초등학생들 구령처럼 장내를 울렸다. 해가 뉘였거렸다. 기름 부음 받은 분들의 즐거운 저녁밥이 자위가 돌 무렵 총회에 모인 총대들이 결의한 대로 부흥사경회가 시작됐다. 가라앉은 설교자의 음성이 성령의 열매를 강조하느라 냅다 외치는 소리에 뒤이어 쿵 하며 대전중앙교회 마룻바닥을 울렸다. 일순 장내가 조용해졌다. 너나없이 무슨 소리인가 하고 두리번거렸다. 보니 한 목사님이 몸을 앞뒤로 흔들며 주무시다가 의자 밖으로 굴러떨어지신 것이었다. 나라도 하나였고 교회도 하나였는데 그리스도인의 행습은 로마 군인들처럼 일정하지가 못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명절인 부활절만 해도 그랬다. 유월절을 지키는 유대인처럼 봄에 달이 꽉 찬 날을 지키는 사람도 있었다. 이를테면 부스럼 예방한답시고 키들거리며 부럼을 까는 정월 대보름을 부활절로 지키는 셈이었다. 그런가 하면 이교도들이 자연을 지배하는 신들이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는 것을 경축했던 봄의 첫날을 부활절로 지키는 사람도 있었다. 부활주간의 부활절날도 가지각색이었다. 어떤 사람은 부활절을 일요일이라고 주장했다. 삼위일체와 이런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콘스탄틴은 주 후 325년 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근처에 있는 안양만 한 니케아 시에서 회집하는 총회를 소집했다. 이 모임을 니케아공의회라고 한다. 이건 전체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인 최초의 집회였다. 전 세계에서 감독들이 꾸역꾸역 니케아로 모여들었다. 아프리카와 시리아에서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샤에서 폰투스, 갈라디아, 밤빌리아, 길리기아, 프리지아,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아가야 및 멀고 먼 스페인 등지에서 감독들이 모여들었다. 로마에서는 사제들이 왔다. 역사가는 콘스탄틴처럼 어떤 군주가 자기의 구세주한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그토록 성대한 축제를 마련한 적이 전무후무했노라고 니케아 총회의 모임에 대해 말했다. 감독들과 사제들이 거대한 홀에 운집하여 황제를 기다렸다. 황제가 홀에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 일어섰다. 그는 하늘에서 보낸 메신저 같았다. 그의 옷을 수놓은 금과 보석들이 빛을 받아 찬란하다 못해 하얗게 빛났다. 황제는 총대들을 만찬에 초대했다. 감독들과 사제들이 줄을 지어 만찬장에 들어설 때 근위병들이 양쪽에 칼을 뽑아 들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을 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한테 경의를 표하기 위한 것이었다. 202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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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세계 교회사 29 - 한 머리와 세 얼굴
Russian icon of the Old Testament Trinity by Andrey Rublev, between 1408 and 1425 한 머리와 세 얼굴 ‘사랑이 뭐길래’라는 연속극이 뭐길래 사람들이 그 시간에 바보상자에 눈길을 모으고 배꼽을 잡기도 하고 혀를 차기도 한다. 어제 대발인가 사발인가 하는 청년이 결혼한 데까지 이른 모양이다. 기독교인이라는 인기작가의 엿가락 같은 이야기 늘림을 어디까지 늘릴런지 사뭇 기대가 된다. 삼위일체 논쟁으로 열 받은 교회들이 모세 앞의 홍해처럼 둘로 좍 갈라졌다. 바로를 피하기 위한 선민의 물 건넘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제국의 통일을 뿌리째 흔들어 놓는 교회의 갈라짐이었다. 로마제국의 통치자 콘스탄틴 황제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는 뒷짐을 지고 어전을 왔다갔다 했다. 제국의 통일을 공고히 해주어야 할 교회가 갈라서서 성부니 성자니 성령이니 하면서 눈에 핏발을 세우고 싸우다니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런 양상은 황제의 정치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를 못했다. 어떻게 해서 쟁취한 제국인데 도움을 엄청 주리라 생각된 교회가 오히려 여론을 분열시키는 데 앞장을 서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사실 콘스탄틴 황제는 삼위일체 논쟁의 본질에 대해서는 이해되는 게 별로 없었다. 측근들을 통해 설명을 몇 번 들었지만 도무지 장님 코끼리 더듬기였다. 그리스도와 성부의 관계를 놓고 설왕설래 하느라 눈에 핏발이 서고 목에 힘줄이 돋는 논쟁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은 온데간데없었다. 논쟁이 뭐길래 교회의 사랑까지 식혀 버리는지. 토론장에 난데없는 폭동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드잡이를 하더니 급기야는 치고받았다. 형제요 자매들인 그리스도인끼리 싸우는 꼴을 나비넥타이에 콧수염 기른 김동길 교수가 봤다면 “이게 뭡니까?”하고 코맹맹이 소리를 느물거렸을 것이다. 콘스탄틴은 그리스도인들이 싸우는데 그만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어렵사리 마련된 제국의 안정이 교회 싸움에 깨질런지도 몰랐다. 내란이 일어나면 자신의 정치생명까지도 위협받을 수 있었다. 어떻게 쟁취한 제국이며 황제 자리인가!황제는 뒷짐을 풀었다. 그는 먼저 메신저를 보내 양 파 지도자한테 항의 조의 나무람을 전달했다. 황제는 말했다. “이게 뭡니까? 이 모든 논쟁은 다투기를 좋아하는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빚은 결과입니다. 말에 담긴 어리석은 차이 때문에 형제끼리 원수처럼 치고받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만 잘 믿으면 되지 이 무슨 망발들입니까?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떻소?” 하나님은 셋이니 둘이니 하고 밤잠을 제대로 못 자며 싸울 때 교인들 사이에는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그림이 유행했다. 이 그림에서 삼위일체가 한 머리와 세 얼굴로 표현되고 있다. 이 그림의 모퉁이에 있는 날개 달린 네 피조물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등을 나타낸다. 이 그림은 사실 너무 단순해서 하나님의 신비를 설명해줄 수는 없다. 현대 의학으로도 감기의 원인도 정확히 알 수 없는데 하나님의 실체를 어떻게 인간의 말과 그림으로 온전히 설명할 수 있겠는가. Holy Trinity Template교회 지도자들은 이런 그림을 보면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좋아했다. 신학적인 설명이야 어찌 됐든 삼위일체는 삼위일체라고 잘 설명해주니까 말이다. 2020-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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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세계 교회사 28 - 삼위일체와 분열
Holy Trinity, depicted by Szymon Czechowicz (1756–1758) 삼위일체와 분열 통일과 화해를 기대하는 소박한 사람들에게 세상은 삐걱거리고 있다. 복면을 쓰고 쇠몽둥이를 든 장정들이 벌건 대낮에 스스럼없이 농부의 아들이 세운 공장을 우우 몰려다닌다. 어린 백성을 정신없는 정신대로 내모는 데 일조를 했던 이 나라 사람들은 누구 하나 나섬이 없다. 대신에 섬나라 자그마한 정치 지도자가 우리 의원끼리 박터지게 싸우던 국회에 나타나 머리만 조아리다 사라졌다. 우리네 지도자들은 정말 이 겨울에 무엇들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정말 우리도 독일처럼 통일이 되어 애국가와 찬송을 남북한 사람들이 함께 목이 터져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고 어떻게 살아야 되는 것일까? 그리스도인들끼리 다른 문제도 아닌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성령의 관계를 놓고 말다툼이 일어났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데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너나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점에 있어서는 옥신각신 할 건덕지가 하나도 없었다. 그렇지만 도대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는 어떻게 된 것일까? 그리스도께서는 실제의 육신을 지니시고 이 땅에 사셨다. 그는 실제로 고난을 받으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정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몸을 일으켜 살아나셨고 그를 믿는 사람들한테 새 생명을 주셨다. 그럴진대 그는 확실히 노대통령 같은 보통 사람보다는 훨씬 더 나으셨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이시라면 신이 두 분이 계시지 않게 되겠는가?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서 일하시고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영도 하나님이시지 않은가? 이럴 경우 신이 세 분 존재하게 되지 않는가? 우리나라에서 영어참고서 제목으로 채택된 바 있는 이 삼위일체 논쟁이 어느 곳보다도 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를 뜨겁게 달구었다. 알렉산드리아에는 아리우스라는 이름의 연로한 성직자가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진실로 인간 이상이었지만 하나님보다는 못했다고 알쏭달쏭한 주장을 점잖게 폈다. 그런데 같은 교회에서 시무하던 아다나시우스라는 부교역자가 감히 아리우스 감독의 주장이 얼토당토않다고 반론을 폈다. 근간에 위장을 덤덤하게 떼낸 목사님이 한 분 계신데 그는 아다나시우스 같이 바른 말하는 교역자를 좋아하신다. 아마 도망다니던 아다나시우스를 당시 이 목사님이 계셨다면 자신의 교회에 특채해서 거둬 주셨을 것이다. 아마 당신의 의견을 그가 또 반대한다고 할지라도. Ikone Athanasius von Alexandria어쨌든 아다나시우스의 그 당시 반론은 박수는커녕 그를 밤낮으로 도망 다니게 했다. 당시에 삼위일체를 주장한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내놓아야 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 이상이셨고 하나님 이하이셨다면 기실 그는 인간도 아니시고 하나님도 아니시게 되고 만다. 그리스도께서 이도 저도 아닌 얼추 묘한 존재가 되시고 마는 것이다. 아다나시우스는 한 분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실재를 공유하셨다. 하나님의 실재를 완전히 공유하시고 우리도 하나님의 실재를 더욱 풍성히 공유하도록 도와주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도 하나님의 실재를 공유하게 된다. 성령도 완전하게 공유하신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러나 그 한 분 안에 하나님의 실재를 공유한 세 분이 계시다. 즉 만유의 주 성부 하나님, 땅에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성자 하나님, 우리 영혼을 감동 시키고 하나님의 일을 가르쳐 주시는 성령 하나님이 계신다. 2020-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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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83_ 개혁의 촛불
- Jan Hus at the Council of Constance. 개혁의 촛불 일본 자동차 공세에 밀려 맥을 못 쓰던 미국 자동차업계를 일으킨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이아코카였다. 그는 일약 미국의 영웅이 되었고 그의 경영 철학과 경험은 세계에 물결을 일으켰다. 미국 내에서의 그의 인기는 너무도 대단해서 그는 워싱턴을 넘보는 마음이 생겼던 모양이다. 그래서 뉴욕타임즈는 칼럼까지 동원해 미국에 필요한 것은 일류 자동차 제조업자지 이류 정치가가 아니라고 호소했다. 『아니 여보게들 아이아코카가 정치를 할 모양이네 정치를 안 하겠다는 말이 영판 정치인 같은 어투로 말하고 있어』 요즘 정치 은퇴를 선언한 사람이 정치를 안 하겠다고 하는 말이 각 일간신문에 계속 실리고 있다. 무슨 꿍꿍이속인지 모르겠다. 위클리프는 부패한 가톨릭교회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의 운동은 영국에서 별 호응을 받지 못했지만 보헤미아에서 지지를 획득했다. 그 당시 영국 왕이 보헤미아 공주와 결혼을 했었다. 현재 체코슬로바키아인 그 나라에서 존 후스는 이탈리아의 종교개혁가 사보나롤라처럼 부패한 성직자들을 공격하는 설교를 했다. 성직자들은 화려한 옷에 달린 술을 휘날리며 말을 탔고 은으로 만든 화려한 색상의 곤봉으로 가는 길에 거추장스런 사람들을 쫓았다. 후스는 거침없는 비난들 때문에 이단으로 고소를 당해 콘스탄스에서 열린 공의회에 회부 되었다. 후스는 자신이 잘못 가르쳤다는 정죄에 대해 결코 그런 가르침을 말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경위야 어찌 됐든 후스는 그걸 취소해야만 한다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후스는 눈을 껌벅거리며 도대체 결코 가르친 적이 없는 걸 무슨 수로 취소할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후스는 거절했고 유죄 판결을 받아 화형당했다. 화형당하는 후스(예나 약전, 15세기 후반) 그 결과 보헤미아에서는 폭동이 일어났고 전쟁으로 확산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하늘은 푸르렀고 성직자들의 뺨은 디룩디룩했다. 개혁의 불빛은 아직 희미했지만 여러 구석에서 촛불들이 타고 있었다. 독일 라인강 계곡을 따라 일단의 조용한 무리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렀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교회를 시작하지도 않았고 수도원을 세우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접촉을 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회복시키려고 노력했다. 이와 유사한 또 다른 그룹이 홀랜드에 있었는데 스스로를 『공동생활 형제』라고 불렀다. 그들은 늘 함께 살면서 물건을 함께 나누고 대부분의 시간을 가르치는데 보냈다. 그들은 그들의 사상을 교육을 통해 이곳저곳에서 퍼뜨렸다. 특별히 학교와 대학교들을 통해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이 그룹을 통해 책이 한 권 나왔는데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성경처럼 읽히고 있다. 이름하여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이다. 어떤 형제가 썼는지는 확실하게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토마스 아켐피스로 알려져 있다. 개혁의 촛불들이 희구하는 것은 하나님 교회의 사랑과 선의 회복이었다. 2022-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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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83_ 개혁의 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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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81_ 죄의 그늘
- 면죄부 판매 죄의 그늘 교황의 아비뇽 유배는 단지 교회의 탐욕만을 증가시켰다. 이유인즉슨 돈을 그러모으기가 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 있는 교황청 토지에서 얻을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교황의 오랜 부재로 토지들을 이웃 통치자들이 마구 짓밟아 못 쓰게 만들었다. 아비뇽에 자리 잡은 교황 요한 22세는 돈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이라면 옛것이든 새것이든 온갖 짓을 다 했다. 물론 세례, 결혼, 장례 등과 같은 정식 예식에 돈이 부과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심지어는 죽은 사람을 둘로 나눠 두 무덤에 매장하는 것조차도 돈만 내면 교회의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유럽 어느 곳에 있든 명색이 주교이면 임지를 받을 때 1년 치 봉급을 고스란히 교황한테 바쳐야 했다. 요즈음 학교 선생이 될작시면 이런 꼴같잖은 일이 있다는데 그 옛날 교황한테서 학교 이사장들이 배운 모양이다. 그래서 어떤 주교직이 공석이 된다면 교황은 얼씨구나 하고 그 자리를 메우려고 다른 주교를 이동시킬 것이다. 그러면 연쇄적으로 주교직이 한 자리씩 비게 되어 주교들이 전부 자리를 옮기게 될 것이다. 그런 뒤 교황은 울며 겨자 먹기로 자리를 옮긴 주교들한테서 부임 첫해의 월급을 모조리 상납받게 된다. 돈을 버는 또 다른 방법으로는 면죄부를 파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어떤 죽은 사람이 연옥에서 괴롭게 지내야 되는 기간을 단축시켜 주는 교황의 허가증이었다. 그 사상은 연옥에서 영향력을 미치는 성자들의 공로를 보관한 보물창고를 교황이 소유하고 있다는 데서 비롯됐다. 이 증서는 타인에게 양도도 가능했다. 가난과 결혼한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이 요한 22세와 같은 탐욕 덩어리 교황한테 지청구를 늘어놓고 교황을 이단이라고 몰아댔을 때 분노의 치명적인 죄가 교회를 침범했다. 교황은 화가 지글지글 끓어올라 본보기로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몇을 이단 심문관에게 넘겨 화형에 처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군주들이 이탈리아의 교회 소유 토지를 탈취해가자 교황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그들과 전쟁을 일으켜 정말 힘써 그러모은 돈을 태반이나 전쟁터에서 허비했다. 교황은 교회가 교회답게 행해야 될 일에는 쓸 돈이 거의 없었다. 또 어떻게 모은 돈인데 그런데 쓸 마음이 털끝만치도 없었다. 교황청이 아비뇽에서 70여 년 만에 로마로 돌아온 뒤 사치와 교만의 죄가 교회를 침범했다. 성직자들은 아주 품위 있게 되었다. 그들은 아름다운 교회당과 그림과 책에 솔찬한 돈을 썼다. 그들은 카드놀이와 잔치에 아주 많은 돈을 활수 하게 지출했다. 그들은 값비싼 의상을 걸쳤고 예배 행렬을 화려하게 꾸몄다. 교황은 강력함을 내보이려고 멋진 의자를 군인들이 어깨에 짊어지고 다니게 했다. 평신도들은 고등종교의 신앙에서 낮은 마법의 주술적 신앙으로 떨어졌다. 그들은 성만찬을 위험을 피할 수 있는 마법의 부적처럼 사용했다. 기독교에 만연된 치명적인 죄와 마법이 교회의 생명을 비칠거리게 했다. 사치의 죄에 빠진 교회 개혁의 외침과 시도들이 유럽 전역에서 불끈거리며 나왔다. 밤이 깊을 대로 깊어 어두운 만큼 밝은 새벽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2022-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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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81_ 죄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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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81_ 죄의 교회 침범
- 서방교회의 분열을 상징화한 14세기의 세밀화 죄의 교회 침범 성경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로 교황권을 튼튼하게 세운 위대한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도 죽고 교회와 세상에 신선하고 감동적인 영향을 미친 프란체스코도 죽었다. 이 세상은 악인만 죽는 게 아니라 의인도 덩달아 죽기 마련이다. 그들 모두가 인간이라 그런 것이다. 인간이 이렇듯 쓰러진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거듭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게 될 텐데. 어쨌든 이노켄티우스 3세와 프란체스코가 죽은 뒤 중세는 내리막길을 마구 달렸다. 일단 지어진 대 예배당은 변함없는 매력을 간직할 수 있었다. 돌로 된 건물은 비바람으로 인한 마모를 견딜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명을 지닌 인간은 자기 특성을 잃을 수도 있다. 게다가 교회는 인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가 교회를 침범했다. 그것은 로마 제국을 침범했던 야만인들보다 훨씬 심한 피해를 교회에 끼쳤다. 그러나 야만인들이 로마인을 죄다 죽이지 못했던 것처럼 그 죄들이 교회의 모든 덕을 파괴하지는 못했다. 중세의 아주 깜깜한 어둠의 시간 속에서도 신앙의 촛불이 최소한 깜박거리고는 있었다. 교회가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교회의 특성과 힘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여러 종류의 시도가 여러 곳에서 일어났다.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 즉 칠죄종(七罪宗: 죄의 일곱 가지 근원)은 오만 탐욕 사음 노여움 탐식 질투 나태 등을 이른다. 그 가운데 특별히 다섯 가지 죄가 교회를 냅다 쳐들어왔다. 이것들을 이런 모양의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탐욕은 약탈 포대기를 싣고 달리는 말로 묘사된다. 탐식은 맛있는 음식을 통째로 삼키는 짐승으로 표현된다. 사치는 온갖 모양을 내느라 여념이 없는 여인으로 그려진다. 남자도 이 짓을 했다. 노여움은 연약한 처녀의 머리를 칼로 내리치려는 걸로 묘사된다. 교만은 자기 말에서 굴러떨어져 채이는 그림으로 나타난다. 약탈 포대기를 나를는 탐욕 교회의 탐욕은 국가와 아주 심하게 마찰을 빚었다. 국가도 역시 탐욕 덩어리였다. 싸움을 하면서 교회는 더욱 탐욕스러워져 갔다.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은 부자가 되었고 왕들은 질투로 배가 아파 몸살을 앓았다. 특별히 영국과 프랑스 왕은 강력한 국가를 구축하고 있는 참이라 많은 돈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그들은 돈을 가지고 있는 대상이면 누구에서도 그걸 얻거나 뺏을 마음의 준비가 단단히 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그들은 5.6공 시절에 살고 있는 셈이었다고나 할까. 영국 왕은 교회 재산 축적에 도움을 줬고 프랑스 왕은 자기 나라의 어떤 돈도 로마로 보내는 걸 아주 싫어했다. 이에 발끈한 교황 보니파키우스 3세는 교회의 재산을 뺏어 가는 어떤 왕도 왕한테 교회 재산을 바치는 어떤 성직자도 출교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그러나 프랑스 왕은 아주 시덥잖다는 표정으로 교황을 생포해 프랑스의 한 궁벽 진 촌락으로 교황청을 이전시킴으로써 교황의 으름장에 답했다. 그 촌락 이름이 아비뇽이었다. 교황들이 70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로마에 부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1305-1377) 이 시기를 유대인의 바벨론 포로 기간을 본 따 교황청의 바벨론 유수라고 한다. 2022-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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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81_ 죄의 교회 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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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79_ 새로운 수도원 운동
- Giotto Legend of St Francis Sermon to the Birds 새들에게 설교하는 성 프란치스코 새로운 수도원 운동 위대한 교황 이노켄티우스 시대에 새로운 종류의 수도원운동이 일어났다. 새로운 수도원 운동의 바람을 탄 수도사들은 자신들이 세상과 떨어져 살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수도사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를 탁발수도사(friar)니 형제를 뜻하는 라틴어 frater에서 온 말이다. 탁발수도사들은 함께 모임을 갖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백성들과 함께 보냈다. 새로운 수도원 운동의 지도자는 프란체스코였다. 그는 이탈리아의 조그만 마을 아시시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부자 상인이었다. 그 애비에 그 아들이라는 통설과 달리 프란체스코는 부자가 되기를 꺼렸다. 세상에서 생기는 어려움은 사람들이 부를 얻고자 몸부림치며 싸우는 데서 비롯된다고 프란체스코는 믿었다. 그리고 교회의 어려움은 수도원들이 너무 부유해지고 너무 편안해져서 가난한 사람들을 잊어버리는 데 있었다. 프란체스코는 『가난 양』(Lady Poverty)과 결혼했다고 말했다. 그는 날마다 하루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는 아무것도 결코 가지려고 하지를 않았다. 그는 화폐 가치가 있는 선물은 어떤 것도 고개를 외로 꼬았다. 그는 입을 옷과 먹을 음식만 받았다. 그는 노동을 했지만 입고 먹는 것 이상의 임금은 원하지 않았다. 그는 최상의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최악의 것을 위해서 구걸했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입으려고 하지 않고 먹으려고 하지 않는 것을 빌었다. 또한 그는 내일의 것이 아니라 그날에 필요한 오늘의 것만을 위해 구걸했다. 그는 몸의 건강조차도 자신의 소유에 속한 무엇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나병에 걸릴지도 모르는데 나환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그들을 기꺼이 찾아갔다. 그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들이건 도시건 가리지 않고 찾아갔다. 우리 찬송가 가사따나 아골 골짝 빈들에도 그는 복음을 들고 찾아갔다. 그가 활동하던 때는 도시들이 성장을 거듭하는 시기였다. 프란체스코의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주님의 모본을 따라 사는 실체를 몸소 보여주며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전도자들이 되었다. 프란체스코는 물건 소유를 포기했을지라도 그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신 아름다운 세상을 소유한 부유함을 느꼈다. 프란체스코의 손과 발에 나타난 흔적들을 스티그마타 즉 성흔이라고 한다. 스티그마타(stigmata)의 복수형이다. 그 흔적들은 붉은 반점들인데 프란체스코가 그리스도의 상처들을 너무도 많이 생각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했다. Giotto Legend of St Francis Stigmatization 성흔을 받는 성 프란치스코 프란체스코는 날아다니는 새들을 앉혀 놓고 행한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다. 『작은 자매들이여 하나님께서 너희를 방주 속에서 구원해 주셨고 훨훨 날아다닐 수 있는 하늘을 너희한테 주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너희는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지만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신다. 하나님께서 둥지를 만들어 살라고 너희에게 큰 나무들을 주셨다. 너희는 누에를 치지도 않고 목화를 심지도 않았는데 너희에게 털옷을 입혀 주셨다. 그러므로 작은 자매들이여,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 되지 말고 하나님을 열심히 찬양하도록 해라』 2022-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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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79_ 새로운 수도원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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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78_ 교회교육
- 논쟁하는 학자들 교회교육 언제는 쇠뜨기 풀이더니 이제는 소금이 유행이다. 건강에 소금물 복용이 그만이란다. 그것에 관한 강습회도 있고 가르침대로 따랐더니 효과를 봤다고 여기저기 퍼치는 소금 전도사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그에 반해 정신건강을 위한 방법 개발에는 늘 잠잠하다. 정신이 저마다 건강해서인지 아니면 생명 연장에 정신건강이 별 소용이 닿지 않는다고 생각들 하는 모양이다. 우리네 정신건강은 실로 나쁘기 그지없다. 검사가 검사한테 잡혀가 구속당하고 목사가 목사의 고발로 구치소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고 전직 대통령들은 외출도 못하고 자기들 보호를 위해 발사된 최루탄에 눈물을 흘리고 있다. 대학들은 부정입학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돈으로 해결하려고 사람들은 돈돈 하겠지… 아이를 체벌하는 수도사 배우고자 소년들이 선생인 수도사한테 몰려와 이야기를 나누는 기록이 있다. 소년들: 선생님 저희 어린이들은 정확하게 말할 수 있도록 저희를 가르쳐 달라고 선생님께 부탁드립니다. 선생: 배울 때 매도 맞아야 할텐데? 소년들: 무식하기보다는 매 맞는 게 차라리 낫겠어요. 그러나 선생님은 친절하시고 괜히 매를 때리지 않으신다는 걸 저희는 알고 있어요. 선생: 너희는 무슨 일을 하니? 첫 번째 소년: 전 수도사가 될래요. 하루에 일곱 번씩 형제들하고 노래를 불러요. 그 사이에 라틴어를 배우고 싶어요. 선생: 이 친구들은 무얼 하는지 알고 있니. 첫 번째 소년: 농부도 있고 양치기도 있고 소치기도 있고 사냥꾼도 있어요. 그리고 어부, 행상, 상인, 구두 만드는 사람, 빵 만드는 사람도 있어요. 선생: 농부 너는 무슨 일을 하니? 농부: 아주 고된 일을 열심히 합니다. 새벽에 소를 몰고 밭에 나가 쟁기질을 합니다. 날마다 2천 평 이상의 밭을 갈아야 합니다. (소년마다 무슨 일을 하는지 질문을 받는다. 소년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최고라고 말다툼을 하기 시작한다.) 선생: 자 조용히들 하려무나. 각자 서로를 도와주어라. 자기 일을 최선을 다하도록 해라. 사제이든 수도사이든 평신도이든 군인이든 누구라도 자기 일을 할 수 있는 대로 열심히 해야 한다. 일에 힘쓰고 분수를 지키도록 해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점잖게 행동해라. 교회 종소리를 들을 때 조용히 걸어라. 교회 안에서는 거룩한 제단에 공손히 절을 해라. 그리고 조용히 걸어라. 교회 안에서는 거룩한 제단에 공손히 절을 해라. 그리고 조용히 서서 같은 음으로 찬송을 하고 죄 용서를 구하도록 해라. 교회는 어린 소년들뿐만 아니라 나이든 학생들도 가르쳤다. 교회의 주도로 신학을 가르치기 위한 대학교들이 설립됐다. 대학교는 하나님에 관해 가르쳤고 우주를 이해시키기 위해 철학을 가르쳤다. 그리고 법학과 의학도 가르쳤다. 대학교 선생들은 석사나 박사로 불리웠다. 그들은 서로 논쟁을 벌임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폈다. 학자의 논쟁이 줄어들고 눈치 보기만 한껏 늘어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서 더욱 이단이 기승을 부리고 목회자들은 괜한 일에 이리 몰려다니고 저리 몰려다닌다. 202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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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78_ 교회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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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복과 은혜와 평강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 주신 말씀_ 민수기 6: 24~27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화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복과 은혜와 평강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몇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민 14: 22) 위 말씀은 가데스바데아 바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 중 선발된 정탐꾼 열두 명이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두루 정탐한 후 돌아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제사장 나라’ 계약을 파기하고 애굽의 노예로 살기를 선택하자 하나님이 보이신 분노의 말씀이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은 열 하루면 가고도 남을 가나안 땅을 40년을 돌아서 가게 되고 하나님을 거역한 출애굽 세대는 모두 광야에서 죽는 벌을 받았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에도 하나님은 40년간 변함없이 만나를 내려주셨고 저들의 의복을 헤어지지 않게 하셨으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여 주셨다. 항상 복과 은혜와 평강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을 ‘외면’하는 사람은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바로 우리들이다! 그렇게도 수없이 하나님의 이적을 체험하고 은혜와 영광을 보면서도 쉽게 믿음에서 약해지고 약속을 잊어버리는 인생! 그는 바로 ‘나’일 수도 있다. 내 인생 모든 날은 차치하고 근래 3년간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이적과 은혜만은 단 한 시도 잊어서는 안되리라! 아멘. 202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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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복과 은혜와 평강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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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64_ 유럽의 아버지 왕
- 유럽의 아버지 왕 북한산 계곡을 흐르는 물에 큰 몸집이 잠겼다. 같이 잠수했던 청년들이 얼마 안 있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푸푸 거리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나 덩치 크신 나이 든 분은 물속에 기도하듯 엎드린 채 감감했다. 주위에 섰던 사람들 얼굴에 의아한 빛이 감돌 때 거구가 부상하는 고래마냥 고개를 쳐들었다. 물속에 더 있을 수 있는데 심심해서 나왔다는 표정으로 그는 뜨거운 열기를 내리쏟는 창공을 응시했다. 얼굴에서는 계곡물이 뚝뚝 굴렀다. 물가에 서 있던 부목사, 장로들, 여름 성경학교를 마친 교육전도사와 교사들이 탄성을 질렀다. 그런 건강 덕이었는지 그는 92세까지 살다 며칠 전 로스엔젤레스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묘하게도 당시 부목사였던 분도 미국 공항에서 몇 달 전 천국 문을 두드렸다. The Coronation of Charlemagne, by assistants of Raphael, c. 1516–1517 샤를마뉴의 어떤 궁전 시인은 그를 일컬어 『유럽의 아버지 왕』이라고 노래했다. 그는 742년 페핀 3세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이 집안은 본래 메로빙 왕조 치하에서 대신으로 봉직했다. 나중에 메로빙 왕조가 쇠약해지자 페핀 집안은 정권을 장악하고 왕조를 세웠다. 이 왕조를 샤를마뉴의 이름을 따라 카롤링 왕조라고 한다. 샤를마뉴는 아버지가 절대권과 왕권을 독점하기 위해 동생 칼로만과 치열한 싸움에 몰두해 있는 동안에 성장했다. 페핀은 골육상쟁에 지친 동생 칼로만이 수도원으로 은퇴하자 조카들을 정권에서 제거했다. 정권 장악의 길이 잘 닦여지자 페핀은 메로빙 왕조의 지배권을 빼앗고 751년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러한 찬탈 행위에 대한 정당화는 교황 자카리아스가 마련해준 교회의 승인을 통해 이루어졌다. 왕권은 신성시 되었기에 신학의 응답이 없이는 권력 찬탈을 정당화할 수 없었다. 자카리아스의 후계자 스테파누스 2세가 옷자락을 휘날리며 753~754년 겨울에 프랑크 왕국을 화급히 방문했다. 그것은 로마를 공격하는 롬바르드의 침입을 막아달라는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열두 살이었던 샤를마뉴가 교황을 영접하기 위해 마중을 나갔었다. 롬바르드국에 대항해 맞은 프랑크 왕국과 교황 사이의 정치적 동맹은 아주 적절한 때에 이루어졌다. 페핀이 계속 전투를 벌이는 동안 샤를마뉴는 계속해서 종군했다. 이런 청년기 경험들이 샤를마뉴의 성격 형성과 목표 설정에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샤를마뉴는 아버지 페핀의 성격을 똑 닮았다. 권력에 대한 굽히지 않는 의지, 외부의 적에 대항하고 영토를 넓히기 위한 싸움에 대한 만반의 준비, 친척의 권리를 빼앗는 한이 있더라도 혼자 통치하겠다는 절대 권력욕 등에 있어서 아버지 성격을 능가하면 했지 결코 뒤짐이 없었다. 샤를마뉴는 일찍부터 세속 권력과 교회와의 밀접한 관계를 인식했다. 샤를마뉴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파하는 교회와 왕의 의무를 아주 존중했다. 또한 그는 교회의 충실한 신하임을 자처하면서 자신에게 위임된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하나님에게 책임을 져야 함을 깊이 인식했다. 즉 샤를마뉴는 자신을 하나님의 신하로 생각했다. 샤를마뉴가 지닌 인격의 힘은 신의 뜻에 일치한다는 변함없는 확신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다. 그는 현재의 기독교적인 유럽 형성에 큰 기여를 했다. 그는 진정 유럽의 아버지 왕이었다. Later depiction of Charlemagne in the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2021-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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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64_ 유럽의 아버지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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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63_ 샤를마뉴
- Imperial Coronation of Charlemagne, by Friedrich Kaulbach, 1861 샤를마뉴 웬 겨울이 이리 봄날 같은지 모르겠다. 눈이 내리고 산등성이에 눈이 쌓이고 처마에 고드름이 달리는 풍경을 볼 수 없다. 먹고 사는 건 나아졌는데 환경은 나빠졌다. 이게 우리 인간에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선뜻 판단이 서질 않는다. 그 옛날 어렸을 적 한강이 꽝꽝 얼어 한남동에서 보광동까지 썰매를 지치며 왔다 갔다 했는데. 그런 이야기는 이제 동화 속의 사건쯤으로 돼버리고 말았다. 새해가 되니 달라진 거라곤 달력의 연도를 알리는 숫자뿐이고 모든 게 그대로다. 사기 치는 사람은 계속 속이고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연신 두리번거리며 도울 일을 찾는다. 햇빛이 따사해지면 그 열기에 자극받은 종달새는 긴 잠에서 깨어나 창공을 나르며 맑은소리를 바람에 날리겠지. 사는 날까지 믿음과 소망을 간직하고 견뎌야 살맛 나는 세상을 누릴 수 있겠지. 일흔다섯이 된 늙은 선교사 보니파키우스의 얼굴이 새삼 내 망막에 어른거린다. 보니파키우스는 프리질랜드인에 대한 자신의 첫 번째 선교 실패를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는 습하고 막무가내로 억척스러운 프리질랜드인들한테 돌아갔다. 이번에 그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자 그것을 눈꼴이 시어 못 보는 야만인들이 노기충천하여 칼을 꼬나 쥐고 보니파키우스와 함께 한 사람들에게 밀어닥쳤다. 보니파키우스의 제자들이 그를 가로막고 나섰다. 그러나 늙은 선교사는 그들을 만류하며 말했다. 『싸우지 마시오. 우리는 악을 선으로 갚아야 됩니다. 용기를 내시요. 몸만 죽일 수 있는 사람들을 겁내지 마시오.』 이방인들은 선교사와 제자들을 죄다 죽였다. 그리고 눈이 벌게 피 묻은 칼을 들고 재물을 찾았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 비치는 건 성경 사본들과 성물 나부랭이들뿐이었다. 중세란 게르만이 이동하는 5세기에서 동로마가 멸망하는 15세기 중엽까지를 일컫는다. 이 시기에 걸출한 인물을 꼽는다면 신앙에 근거한 확신에 차 역사에 획 점을 크게 찍은 샤를마뉴를 빼놓을 수 없다. 샤를마뉴란 프랑스어로 발음된 이름이고 영어로 말하면 찰스 더 그레이트(Charles the Great) 찰스대제를 말한다. 그는 로마제국 이후 가장 큰 제국을 설립한 인물이다. 색슨족이라고 하는 북부 독일인들은 프랑크족의 왕 샤를마뉴를 통해 울며 겨자 먹기로 신앙을 가졌다. 무력으로 전도하는 샤를마뉴 샤를마뉴는 26년간 색슨족과 싸움을 벌인 끝에 그의 신앙과 통치를 색슨족에게 먹히게 할 수가 있었다. 색슨족은 칼끝이 무서워 신앙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참된 본질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다행히 그런 전도 방법에 수긍한 그리스도인들도 더러 있었다. 색슨족이면서 샤를마뉴의 자문이 된 알쿠인(Alcuin)이라는 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 『색슨족한테서 돈을 쥐어 짜내려고 드센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가벼운 멍에를 억지로 씌운다면 그들이 세례는 받아도 신앙이 그닥 튼튼하지를 못하게 될 것이다. 선교사들은 전도자가 되어야지 약탈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Emperor Charlemagne, by Albrecht Dürer, 1511–1513 아주 다행스럽게도 칼을 앞세운 강압적인 전도 방법은 자주 사용되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보다 부드럽고 기독교적인 방법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2021-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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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63_ 샤를마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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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62_ 선교사 보니파키우스
- Saint Boniface by Cornelis Bloemaert 선교사 보니파키우스 엄벙덤벙하는 새 한해의 끄트머리에 서게 됐다. 다가오는 새해를 마주하고 뒤돌아보면 속 쓰림이 가슴을 맴돈다. 지나온 길이 성에 안 차기 때문이다. 새해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안다미로 하는 삶의 길을 걸어야겠다. 우리 역사에서 정점에 서 있다가 역사의 장으로 평가가 옮겨지는 두 인물이 있다. 한 사람은 은퇴를 준비 중에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은퇴를 선언했다. 한 사람은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데 앞장서 투쟁한 공로가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장군 출신 대통령으로 민주화의 기틀을 눈에 띠게 다진 공로가 있다. 묵은해를 보내며 두 사람의 공로에 깊은 존경과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후계자 문제로 진통을 겪는 교회현실에 비추어 볼 때 참으로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없는 귀감이다. Portrait Roi de france Clovis 게르만의 일족인 프랑크족은 본디 이교도였다. 프랑크족은 프랑스 독일 이태리 등의 나라를 세우게 된다. 프랑크족이 사람답게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그들의 왕 클로비스(Clovis) 치하에서였다. 클로비스는 기독교 신앙을 지닌 클로틸라 공주와 결혼했다. 그녀는 남편을 자기가 믿는 주님에게 인도하려고 애를 썼다. 클로비스는 들은 척도 않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전투에서 패배의 위험에 빠졌다. 그때 그는 부르짖었다. 『내 마누라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시여 절 좀 도와주십시오. 저는 누구한테 이런 소리 해본 적이 없습니다. 도와주시어 제가 이기면 당신의 이름으로 세례받을 것을 맹세합니다. 이제 당신께 기도드립니다. 부디 내 대적에게서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클로비스는 승리했다. 그는 모든 신하를 거느리고 세례를 받았다. 독일의 회심은 영국에서 온 한 선교사한테 힘입은 바가 컸다. 그는 이름이 영어로는 위니프래드(Winifred)라고 하고 라틴어로는 보니파키우스라고 흔히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현재 네덜란드에 해당하는 프리즐랜드인이라는 부족 속에 들어가 사역을 했다. 그러나 프리즐랜드인은 선교사를 쫓아냈다. 그는 라인강 훨씬 위쪽으로 올라가 선교사역을 해야만 했다. 독일인은 거대한 떡갈나무를 보탄(Wotan)이라고 부르며 신으로 받들었다. 보니파키우스는 그 나무를 베어 보탄이 전혀 신이 아님을 증명하겠노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흰소리 뇌까리는 허튼수작에 신의 진노를 사 보니파키우스가 거꾸러지는 꼴을 보게 됐다고 수다들을 떨었다. 정작 선교사가 도끼를 들어 우람한 떡갈나무를 후려쳤을 때 갑작스럽게 엄청난 돌풍이 일어나 나무줄기를 네 토막으로 쪼갰다고 전설은 전한다. 보니파키우스는 네 동강 난 나무를 널빤지로 켜 판자 교회를 지었다고 한다.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을 가르칠 요량으로 보니파키우스는 실제로 풀다에 수도원을 세웠다. 그가 죽기 전에 그 수도원에서 4백 명에 달하는 수도사들이 사역을 하고 있었다. Schloss Fulda 보니파키우스는 이제 일흔다섯이 됐다. 대주교까지 된 그는 프리즐랜드인에 대한 첫 번째 선교 실패를 스스로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마인츠 대주교직을 사임하고 그는 프리즐랜드로 돌아가 선교사역을 하다 살해당해 순교했다. 그는 평생 하나님 나라만을 전하다 갔다. 2021-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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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세계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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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62_ 선교사 보니파키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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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61_ 성 마르탱
- Louis-Anselme Longa, La charité de saint Martin 성 마르탱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신앙을 생각하면 장로였고 지역을 생각하면 선생이었고 아파트를 생각하면 회장이었다. 소문은 무성했다. 예상은 확실한 통계를 근거로 하고 있었는데 사람마다 말이 달랐고 공식적인 여론기관은 두리뭉실한 침묵으로 눙쳤다. 생게망게하는 중에 변화를 택해 귀중한 한 표를 찍었다. 포장 쳐진 뒤깐 같은 데서 기도까지 곁들였다. 마음 졸이며 브라운관 앞에 바싹 다가앉아 눈과 귀를 모았지만 상황은 기대를 빗나간 예상대로였다. 실로 오랜만에 국민의 뜻이 나름대로 반영된 선거였다. 꾀하는 것은 인간이 이러고저러고 하지만 결정은 하나님이 하신다. 권세란 자고로 위로부터 나는 것이다. 기름 부음 받은 장로로 대통령이 된 분을 위해 기도해야겠다. 그가 링컨처럼 억눌리고 소외받는 사람한테 혜택이 돌아가는 공의와 공평이 푸른 기와집에서 푸르른 강물처럼 흘러나오게 하고 남과 북이 합쳐지게 하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도록 뜨겁게 기도해야겠다. 그를 이용해 어떤 기득권이나 편의를 늘이려고 할 때 콘스탄틴 치하에서 겪었던 기독교의 전철을 밟게 되고 말 것이다. 그에게 종교의 짐을 지우지 말고 공의의 말씀에 따라 통치하는 지도자가 되길 간절히 빌어야겠다. 프랑스는 야만인들이 끼어들기 전에 개종 됐었다. 거개의 나라가 콘스탄틴 시대 무렵에 그리스도교국이 됐다. 프랑스의 개종을 마무리화 하는데 도움을 준 선교사들 가운데 한 사람은 성 마르탱이었다. Monument to Saint Martin of Tours in Odolanów 군인이지만 아직 그리스도인은 아닌 마르탱은 어느 날 거의 벌거벗은 거나 다름없는 한 사람을 만났다. 마르탱도 외투가 한 벌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외투를 칼로 두 토막 내 큰 쪽을 거지에게 건네줬다. 거지는 머리를 방아개비 마냥 연신 조아리며 은혜는 잊지 않겠노라며 감사를 표했다. 그날 밤 마르탱은 꿈을 꿨다. 그 꿈속에서 그는 외투를 잘라준 거지가 바로 그리스도이셨음을 알게 된다. 그 뒤 마르탱은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얼마 안 있어 군대를 떠나 수도사가 되었다. 나중에 그는 주교가 되었다. 마르탱을 통해 많은 이교도들이 신앙을 얻었다. 죽은 후 마르탱은 공식적인 성자로 추대되었다. 그래서 민간인들은 마르탱의 뼈다귀도 기적을 일으킨다고 믿었다. 마르탱의 유물이 한 지방에서 다른 지방으로 옮기게 되면 일부 큰일 났다 싶은 거지들은 한사코 지방 경계선을 넘나들었다. 혹시 난 병이 낫고 거지 신세를 면할까 해서 말이다. Tomb of Saint Martin 그러나 마르탱의 유물 덕을 보려는 거지들은 이번 선거에 나선 여느 후보들 마냥 쓴맛을 보았다. 때아닌 대통령선거에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나심을 기리는 성탄절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이때 선거구호 대신 자선 남비를 채워주기를 바라는 댕그렁 소리가 거리 소음을 헤치고 있다. 교회마다 치렁치렁 등을 밝히고 있다. 아이들은 성탄절 맞이를 위한 준비에 교회를 밤마다 들락거린다. 교회에 톱밥 난로가 있던 시절 우리는 교회에 나가 연극을 보고 노래를 듣고 과자 봉다리를 받는 짜릿함을 만끽했었다. 이제는 보여주고 전하고 줄 때가 된 것 같다. 그리스도처럼... 2021-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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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61_ 성 마르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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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60_ 앵글로색슨
- 앵글로색슨 바람이 제법 맵다. 얼마 안 있으면 맵찬 바람이 귓바퀴를 할퀼 게다. 추위를 생각하면 따스한 곳에서 활동하시는 돌쇠선교사님의 텁텁한 모습이 둥실둥실 떠올라 웃음 짓게 한다. 거금 3억 원을 선뜻 내놓고 목쉬기 경주에 뛰어든 사람이 글쎄 여덟이나 된다. 좋아진 세상이다. 돈만 있음 아무나 대통령선거에 나설 수 있다. 이번에는 놀랍게도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장군 출신은 하나도 없다. 세상 오래 버티고 볼 일이다. 그러면 볼거리를 심심찮게 먹거리마냥 구경할 수 있다. 오! 나의 하나님. 세상에 도대체 이런 일이 있습니까?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식대로 말한다면 이렇습니다. 부정이 있는 곳에는 파리 잡아먹은 두꺼비마냥 눈만 껍벅거리던 기름 부음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글쎄 그런 사람들이 부정이 없는 곳에는 쉬파리마냥 꼬여 왕왕댑니다. 이럴 때는 하나님. 국회의원 나리 된 수염 기른 교수 말마따나 이게 뭡니까? 하고 주님께 되물어도 되는 걸까요? 영국은 남부와 북부로 대별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북부는 산이 많고 땅이 척박하다. 남부는 기후가 온화한 평야 지대이다. 영국에는 본래 이베리아족이라고 하는 원주민이 둥지를 틀고 있었는데 유럽의 유목민인 켈트족이 밀려왔다. 원주민은 북부로 밀려났다. 켈트족은 다시 주전 55년에 로마 장군 시저(카이사르)의 침략을 받고 격렬한 사람들은 북부로 밀려나고 줏대 없는 사람들은 남부에 눌러앉아 로마의 라틴 민족과 동화되어 살아간다. 로마의 평화시대가 이어진다. 로마의 찬란한 문화가 영국에 넘쳐나게 된다. 달도 차면 기운다던가 태평세월 속에 로마제국의 기둥이 썩어들어갔다. 대내외적으로 어려워진 로마 본국은 본토방위를 위해 해외 주둔군을 철수시켜야만 했다. 이로 말미암아 북부로 밀려났던 사람들이 남부를 압박했다. 영국 주둔 로마군의 철수로 다급해진 남부의 켈트족은 바다 건너 색슨족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색슨족이라 함은 독일의 작센지역에 살며 싸움을 일삼던 야만족을 일컫는다. 그 이웃에 앵글로족이 살았다. 어디 싸움질할 데 없나 하며 몸이 근질거리던 색슨족에게 싸움을 도와 달라 하니 마다할 리 없었다. 바다를 건너 싸움 나들이 나선 색슨족은 영국 남부에 도착해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바다 건너 섬 땅이 이렇게 좋다니. 얼마나 온화하고 싱그럽고 초목이 무성한지 그들은 다시 침침하고 습한 색슨 지역으로 돌아갈 마음이 싹 사라졌다. 마음이 돌변한 그들은 북부 지역의 스코틀랜드사람을 쳐부수는 게 아니라 칼 부리를 도움을 요청한 사람들에게 들이댔다. 어처구니없는 처참한 살육전이 감행됐다. 이 소식을 뒤늦게 전해들은 색슨족의 이웃 앵글로 족도 이게 무슨 뭐 같은 경우냐며 서둘러 바다를 건너와 영국 남부를 공략하는 데 뛰어들었다. 힘이 없는 켈트족은 스코틀랜드, 에이레, 아일랜드 등으로 쫓겨났다. 이런 역사를 지니고 있는 영국인인지라 같은 국기 아래 있지만 서로 늘 으르렁거릴 수밖에 없다. 살기 좋은 영국 남부는 앵글로족과 색슨족이 차지했다. 땅이란 힘 있는 자가 차지하는 모양이다. 인간의 역사는 이런 모양으로 흘러가고 교회의 역사는 그 흐름 속에다 십자가를 세운다. 2021-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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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60_ 앵글로색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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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59_ 영국과 천사
-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있는 19세기 모자이크 영국과 천사 쪽 곧은 오래된 길이 있다. 그 길을 걷노라면 고목을 만난다. 고목이 전하는 말 없는 소리는 그 어떤 말로도 흉내 낼 수가 없다. 장로는 뛰고 선생은 달리고 회장은 날아다닌다. 이번 성탄절에는 퀘퀘묵은 정치꾼들의 풀어진 모습을 볼 수 있을 모양이다. 한 사람만 승자가 되고 나머지는 패자가 될 게다. 그날과 그 꼬락서니들이 눈에 선하다. 해 아래 무슨 새것이 있겠는가. 왜 사는 걸까? 그걸 물으며 사는 사람이 잘못된 것일까? 아님 그냥저냥 기분 내키는 대로 사는 사람이 온전한 것일까? 도시 종잡을 수 없는 세상이다. 어쨌든 길이 아닌 곳은 가지 말아야 되지 않을까 싶다. 기름 부음 받은 사람들이란 더욱 그래야 될 게다. 교황 그레고리우스1세는 영국 남부에 선교사들을 파송했던 사람이다. 그가 영국에 관심을 갖게 된 전설이 있다. 어느 날 로마에 있는 왁자한 저자 거리에서 그레고리우스1세는 노예로 팔려고 내놓은 소년들을 보게 되었다. 교황이 짙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저 소년들은 어떤 애들이지?』 『안글레스(Angles) 섬나라 애들입죠.』 이 대답에 영국 소년들을 한 번도 본적이 없던 그레고리우스는 엉뚱한 반응을 보였다. 안그레스(Angles:섬나라 사람)가 아니라 안젤스(angels:천사)겠지. 어쨌든 교황은 어거스틴을 영국 선교사로 파송했다. 그 선교사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히포의 어거스틴과 구별하기 위해 캔터베리의 어거스틴이라고 한다. 로마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이 영국 남부에서 활동을 한 반면에 스코틀랜드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은 북부에서 영국으로 내려가 사역을 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점차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관습과 로마 관습 사이에 차이들이 생겨났다. 아드리엔 이센브란트가 그린 성 그레고리오의 미사 한 가지 차이는 수도사들의 머리 깎는 습관에서 드러났다. 제롬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당시의 수도사들은 율부린너 마냥 머리털을 면도해 싹 밀어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해야 물이 귀한 사막이나 수행지에서 훨씬 편했고 머리를 감지 않아 생기는 불결함을 덜 수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를 면도하는 걸 체발이라고 한다. 이 습관에도 약간씩의 차이는 있었다. 아일랜드 수도사들은 귀에서부터 깎아 성화에 나타나는 후광처럼 작은 머리 뭉치를 남겨 놓았다. 로마 수도사들은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머리털을 깎아 가시면류관처럼 귀 둘레에 작은 머리털 테를 남겨 놓았다. 부활절 날짜에 대해서도 갑론을박이 있었다. 모든 교회가 부활절을 춘분 지난 첫 보름달이 뜬 후 첫 토요일에 지내야 한다는 니케아공의회에서 결정된 관습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근거를 계산해내는 데는 차이가 있었다. 아일랜드인은 오래되고 오류가 많은 월력을 따랐다. 로마인은 날짜 계산에 있어서 보다 정확했다. 아일랜드인과 로마인이 함께 모였을 때 그들은 부활절을 같은 날 지내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생활습관과 생각의 차이로 말미암아 교회는 오랜 세월에 걸쳐 분열과 싸움을 거듭해왔다. 이 문제는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룬다는 그 진리가 평범한 상식이 되기 위해 우리는 피나는 노력을 해야 될 게다. 2021-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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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59_ 영국과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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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58_ 땅에 심은 십자가
- Icon of Saint Patrick, Christ the Saviour Church 땅에 심은 십자가 바람 한 점만 일어도 길 위에 노란 잎이 눈발처럼 내려앉는다. 낙엽이 일렁이는데 그걸 보는 마음이 이리도 감동을 받음은 하나님의 은혜이런가. 예수그리스도를 이방인에게 전하려면 전하는 사람이 먼저 그걸 자세히 알아야 하는 게 당연한 순서였다. 그래서 패트릭은 아이들이 소리쳐 부르는 아일랜드로 달려가지 않고 먼저 프랑스로 갔다. 그곳의 수도원에 들어가 수년 동안 선교에 필요한 이것저것을 배웠다. 공부를 마친 패트릭은 교황의 허가장을 받고 아일랜드로 떠났다. 한때 자신을 노예로 삼아 호되게 부렸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었다. 패트릭 선교사에 관한 이야기는 전설 빼놓고는 별로 알려진 게 없다. 이런 이야기가 하나 전해지고 있다. 어떤 왕이 패트릭에게 사람을 보내 귀한 청동 그릇을 전하게 했다. 시종이 돌아오자 왕이 수염을 툭툭 치며 물었다. 『그래 패트릭이 뭐라고 하드냐?』 『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고맙습니다 라고 라틴어로 말했습니다』 왕의 송충이 같은 눈썹이 찡끗했다. 『그래, 고작 그 말뿐이더냐? 그럼 다시 가서 그걸 돌려달라고 해라』 시종들이 뭐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요령 소리 요란하게 다녀왔다. 『그래 이번에는 패트릭이 뭐라 하더냐?』 왕은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고맙습니다 라고 라틴어로 씨부리던데요.』 『뭐라고? 받아도 고맙다 뺏겨도 고맙다라고? 음 그럼 이번에는 그걸 돌려주면서 땅을 덧붙여 주도록 해라.』 이야기는 두 가지 점에서 사실이다. 하나는 패트릭이 라틴어를 말할 수 있었고 아일랜드인에게 로마어를 가르쳤다는 점이다. 로마제국이 붕괴되던 바로 그때 교회는 로마에서 그 영역을 넓혀 가고 있었다. 로마제국의 군대가 아일랜드에 발을 디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교회선교사들은 로마 관습을 전달했다. 후일 아일랜드의 학식 있는 많은 사람들이 파송되어 유럽인을 가르쳤다. 다른 하나는 왕이 패트릭에게 땅을 줬다는 사실이다. 미개인들의 모든 생활은 땅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큰 도시가 하나도 없어서다. 그들은 땅을 의지해 살았다. 그들이 교회에 감사를 나타내는 방식은 땅을 헌납하는 것이었다. 그 땅에다 교회는 십자가를 심고 가꾸었다. 추수하는 수도사를 나타내는 Q 문자 패트릭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는 옛날 돼지를 치며 노예 생활을 했던 산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산꼭대기에 앉아 하나님의 기묘하신 방법을 곰곰 생각했다. 하나님은 패트릭을 노예로 만드시어 이 아일랜드 백성을 알고 사랑하게 만드시고 예수의 이야기를 가지고 아일랜드인들에게 돌아오게 하셨다. 패트릭이 이런 생각에 잠겨있을 때 그는 자기보다 앞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했던 사람들의 영혼이 자기 주위에 모이는 것을 느꼈다. 뜨거운 감동과 체험이었다. 그는 선배들을 뒤따라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바람이 싸하게 부는 산등성에 오도카니 앉아 있지만 그는 결코 외롭지 않았다. 아일랜드인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아일랜드에서 선교사들이 다른 지역들로 파송됐다. 한 톨의 패트릭이라는 밀알이 아일랜드를 복음의 황금 물결로 일렁이게 했다. 2021-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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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58_ 땅에 심은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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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57_ 노예였던 선교사
- Saint Patrick sent to Ireland by the Pope; wall mosaic in St Mary's Cathedral, Kilkenny. 노예였던 선교사 로마제국에 물밀듯이 들어온 야만인들은 거개가 기독교화 되어 있었다. 그들이 정통 보수 니캐아 신앙을 따르지를 않고 아리우스주의를 따르기는 했을지라도 말이다. 양 파를 갈랐던 사상은 대부분 잊혀졌지만 그 차이는 여전히 중요했다. 아리우스파 그리스도인들은 교황의 지도력을 도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타 야만인들은 이방인들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싸움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그리스도교에 군침을 흘리게 된 주요한 까닭도 그리스도교가 강력한 로마제국의 종교였기 때문이다. 쑥대머리에 누런 이빨로 이죽거리는 야만인들은 로마처럼 힘이 세지려면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고 깜냥에 머리를 굴렸다. 그리스도교의 어떤 점들은 야만인들에겐 도시 이상하기만 했다. 그들은 죽기 살기로 싸움을 밤낮 일삼았기에 오른쪽 뺨을 얻어맞고 왼쪽 뺨을 돌려대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실천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야만인들의 영웅은 사도 베드로였다. 주님께서 겟세마네동산에서 붙잡히셨을 때 베드로가 칼을 쑥 뽑아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단칼에 베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좋은 결혼도 마다하고 세상을 떠나 사는 수도사들을 아무리 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미친 것만 같았다. 이런 막돼먹은 사람들을 교회는 전도해야 했다. 켈트족은 북부 프랑스와 영국 섬들에 살던 사람들이다. 프랑스와 영국에 사는 켈트족은 옛날 로마제국 시대에 개종이 되었다. 그렇지만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는 개종이 되질 않았다. 앵글로 색슨족은 켈트족을 웨일즈로 쫓아낸 새로운 야만족이었다. 그 당시 웨일즈족은 영국 섬에 남아 있는 유일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전도 대상이었다. 먼저 아일랜드가 복음화된 경우를 살펴보자. 아일랜드의 수호성인은 성 패트릭(St Patrick)이다. 그는 아일랜드를 복음화 시키는 일에 누구보다도 많은 기여를 했다. 아일랜드인을 위해 그가 한 일은 악을 선으로 갚은 경우였다. 아일랜드인은 패트릭을 노예로 삼아 심하게 부려먹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에 주둔하던 로마군단들이 로마를 방어하기 위해 영국에서 철수해 본국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힘의 공백이 영국에 생긴 그때 패트릭은 웨일즈 국경 근방에서 살고 있었다. 아일랜드인은 로마군이 없는 영국 해안을 싹슬이 하고 다니다가 패트릭을 생포해갔다. 노예가 된 패트릭은 아일랜드에서 탕자처럼 돼지를 치며 목숨을 연명했다. 패트릭은 그리스도인으로 자랐었다. 그의 아버지는 집사였다. 부모 슬하에서 편하게 지낼 때 그는 건성으로 교회에 들락거렸다. 어처구니없는 고난이 닥치자 그는 주님께 기도했다.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는 아일랜드 해변에서 개를 운반하는 화물선을 어렵사리 얻어 타고 프랑스로 갔다. 그곳에서 다시 고향이 너무 그리워 갖은 어려움을 겪으며 집으로 되돌아갔다. 고향에서 행복에 겨워하며 지내던 어느 날 밤 그는 꿈을 꿨다. 꿈속에서 아일랜드의 아이들이 나타나 지긋지긋한 아일랜드로 돌아와 그리스도를 가르쳐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마음이 움직인 그는 먼저 프랑스로 건너가 수도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노예로 살았던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교사가 되어 아일랜드로 갔다. 아일랜드인에게 전도한 패트릭 2021-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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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57_ 노예였던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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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56_ 수도사 생활
- Saint Benedict and the cup of poison 수도사 생활 나뭇잎에 감돌던 팽팽하고 짙은 푸르름은 짧아진 해 길이 마냥 맥이 풀렸다. 길가에는 스산함이 감돈다. 길을 걸으면 바람이 온몸을 휘감는다. 선뜩해진다. 밝고 뜨겁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상크름하다. 이제 파리한 바위 사이에 붉은 단풍이 고운 자태를 실컷 뽐내겠지. 그러노라면 우리 인생도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 성숙한 알곡을 머금은 곡식이 되겠지. 수도사들은 완전한 침묵에 갇혀 식사를 했다. 조금 일찍 식사를 마친 사람은 자리를 뜨지 않고 책을 읽거나 명상에 잠겨야 했다. 식사 중에 수도사가 손이 닿지 않는 걸 집길 원한다면 벙어리 마냥 수화에 버금가는 손짓을 해야 했다. 예컨대 사과가 필요하면 주먹에 엄지를 세워 앞뒤로 흔든다. 우유가 필요하면 왼손 새끼손가락을 아래로 내려뜨리고 우유가 흐르는 모양으로 아래위로 흔든다. 매큼한 겨자가 필요하면 오른 주먹으로 코를 틀어쥐고 문지른다. 짭짤한 소금이 필요하면 오른손 엄지로 왼손 집게손가락을 툭툭 친다. 침묵 속에 이른 저녁 식사를 마치면 낮잠을 좀 잔 뒤 다시 들판으로 일을 나갔다. 해가 떨어져 땅거미가 기지개를 펴려고 나들이를 시작하면 수도사들은 저녁 기도를 드리고 잠자리에 허리를 뉘였다. 잠잘 때 젊은 수도사들은 나이든 수도사들 사이사이에 끼여 잤다. 젊은이끼리 자다가 젊은 혈기에 드잡이하거나 싸움질하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 젊다는 것은 아무래도 성마른 결기를 잘 돋구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수도사는 자기 소유라고는 도통 없었다. 그래서 침대와 담요 상의와 하의를 배급받았다. 수도사는 칼 한 자루, 바늘 한 개, 글쓰기 위한 철필 한 자루를 지녔다. 칼을 베개 밑에 둬서는 안됐다. 그것은 싸움이 일어났을 경우에 대비 한 것이었다. 칼부림도 있었던 모양이다. 음식은 평범했다. 어쩌다 한 번씩 고기를 먹긴 했지만 음식물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굶는 사람은 없었다. 요리와 식사 당번은 평수사들이 돌아가면서 담당했다. 한 주일 부엌 담당자는 실수를 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주말에는 맡았던 부엌을 깨끗이 치워놓았다. 손님에게는 특별한 식탁이 마련됐고 수도원장이 함께 식사했다. 수도원장은 수도원의 아버지였다. 수도원장을 나타내는 애버트(abbot)는 아버지를 의미하는 아람어 압바(abba)에서 왔다. 수도원 규칙은 수도원장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수도원장은 걱정해서도 안 되고 염려해서도 안 된다. 또한, 그는 너무 요구가 많거나 고집이 세거나 질투심이 많거나 의심이 많아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마음 편할 날이 하루도 없을 것이다.” 수도사들은 모든 일에 수도원장에게 절대 복종해야 했다. 그러나 수도원장은 독단으로 매사를 처리하는 게 아니라 아주 어린 사람일지라도 수도사들과 의논을 해야 했다. 모든 수도사들은 자신의 잘못을 서로에게 고백해야 했다. 수도원이 은신처 역할을 위해 섬이나 산꼭대기에 세워졌던 것이 점차 야만인들이 사는 곳에 세워졌다. 수도사들이 그들에게 땅을 개간하고 길을 닦고 다리를 놓는 방법을 가르쳤다. 또한, 수도사들은 어린애들을 맡아 가르쳤고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이라 책들을 베꼈다. Mount St. Benedict monastery, St. Augustine, Trinidad. 2021-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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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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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56_ 수도사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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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55_ 수도사의 일과
- 수도사의 일과 이제 어느 길이랄 것도 없이 노상 막힌다. 신호등이 멀쩡하게 눈을 껌벅이는데도 네거리가 곧잘 뒤엉키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우회전한다. 신호등 하나를 받고 나면 좌회전을 받아야 될 사거리가 기다린다. 여기만 넘어서면 다 온 셈이다. 왼쪽 화살표가 나왔다. 골프장 근처의 어수선함만 지나치면 총회회관이다. 차를 주차장에 대놓고 4층까지 계단을 뛰어오른다. 자리에 앉는다. 기도한다. 마주치는 직원과 아침 인사를 건네며 예배실에 들어선다. 묵상에 잠긴다. 하나님께 이것저것을 부탁드린다. 그리고 그분의 나직한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본다. 성경을 몇 장 본다. 아홉 시 예배시간에 맞춰 직원들이 회의실을 메운다. 찬송을 부른다. 짤막한 설교 말씀을 듣는다. 그날 담당자가 기도하고 주기도문으로 마친다. 이제 총회의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로마제국이 무너지고 재편된 새로운 서방세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수도원 제도를 바꾼 인물은 성 베네딕투스였다. 그는 이태리에 살았다. 야만인들이 나라를 혼란스럽게 휘젓고 다닐 때 베네딕투스는 깎아지른 산꼭대기 절벽에다 수도원을 건립해 피난민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했다. 그곳을 몬테카시노라고 한다. 베네딕투스 수도규칙에도 진부한 조항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수도사는 결혼해서는 안 되고 가난해야 되고 절대 복종해야 된다는 조항이 그랬다. 새로운 규칙은 수도사는 수도원에 머물러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은수사들이 유랑자마냥 방랑함으로써 심심치 않게 골치를 썩였다. 성 베네딕투스 수도회의 수도사들은 특별한 허락을 받지 않고는 수도원을 떠날 수 없었다. 그런 연유로 수도원은 생활에 필요한 일체의 것을 제공해주어야 했다. 수도원에는 들과 강, 우물, 빵집, 부엌 등이 있어야 했다. 수도사들은 농사를 짓고 나무를 베고 요리를 하고 음식 나르는 등의 노동을 직접 담당해야 했다. 하루를 쪼개서 혼자 할 수 있는 손으로 하는 일, 기도, 명상을 하고 여럿이서는 찬양과 독서, 연구, 식사, 수면을 행했다. 기상을 알리는 종은 아침 두 시에 댕그렁거렸다. 그런데 이게 그닥 무리하지 않았던 것은 취침은 저녁 여섯 시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루 일과의 구분은 계절에 따라 변했다. 일과표가 이렇다. 아침 2시에서 4시까지 기도 아침 4시에서 4시 15분까지 명상 아침 4시 15분에서 6시까지 기도 아침 6시에서 9시까지 연구 아침 9시에서 12시까지 들판 노동 오후 3시 저녁 식사 오후 3시를 noon이라고 했다. 이 단어는 제9시를 의미하는 라틴어 nona에서 유래됐다. 오전 6시부터 헤아려 보면 오후 3시가 된다. 수도사들은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제9시인 noon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수도사들은 아무리 뱃구레 쪼르륵 아우성을 쳐도 수도규칙을 바꾼다는 것은 여러모로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들은 규칙에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시간을 올려 땡겼다. 다시 말해 오후 3시인 noon을 12시로 올려 잡은 것이다. 바로 그게 오늘날 noon이 12시가 된 까닭이다. 만사가 먹자고 하는 노릇이니 수도사들인들 먹기 위해 머리를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게다. 2021-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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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55_ 수도사의 일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