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5-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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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법의 구속을 벗어나기 어렵다. 소크라테스는 국법이 암묵적 약속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불리한 경우라도 수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법의 판결에 따라 기꺼이 독배를 마신 철학자도 법이 모든 것 위에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한 나라의 법이 어떻게 인간의 권리와 의무를 모두 담아낼 수 있을까. 하물며 그렇게 불완전한 법이 문재인 같은 눈먼 권력자의 손에 들어간다면 그 결정을 따르는 것이 옳은가? 그래서 법과 그 법 너머의 갈등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그런 갈등의 파국을 보여주는 비극이다.


안티고네는 불행한 여인이다. 그녀는 존엄한 왕에서 역병을 불러온 패륜범으로 전락한 오이디푸스의 딸이었다. 불행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자리를 놓고 두 오빠가 다퉜고 이 싸움은 칼부림으로 끝났다. 이웃 나라를 끌어들여 권력을 탈취하려던 폴뤼네이케스와 그에 맞섰던 에테오클레스가 서로 찔러 죽였다. 이 사건은 또 다른 불행을 낳았다. 조카들의 죽음을 계기로 왕위에 오른 크레온이 폴뤼네이케스를 반역자로 낙인찍고 시신 매장을 금지하는 왕명을 내렸다. 


"이 명령을 어기는 자는 시민들이 돌로 쳐서 죽일 것이다."


왕의 명령은 곧 국법이었다. 안티고네는 어찌해야 할까. 국법의 이름으로 선포된 크레온의 명령을 따라야 할까. 아니면 가족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오빠의 시신을 묻어야 할까. 안티고네는 자신의 몰락을 예감하면서도 진실을 파헤치는 고집스러운 아버지 오이디푸스를 닮았다. 안티고네는 오빠의 시신을 매장하기로 결심한다. 안티고네는 자신의 결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것이 낳을 결과가 어떤 것인지 잘 안다. 오빠의 시신 매장은 목숨을 건 ‘범행’이다. 하지만 그녀는 주저하지 않는다. 안티고네에게는 그 일이 ‘경건한 범행’이었기 때문이다. 외삼촌이자 군왕인 크레온을 향해 그녀가 외친다. 


“내 가족과 나 사이를 가로막을 권한이 당신에게는 1도 없어요.” 


새로운 나라의 법을 지상의 가치로 내세우는 크레온의 완고함과 오래된 가족의 법을 따르려는 안티고네의 단호함이 충돌한다.


“이것을 금한 법을 포고한 걸 알고 있었느냐?”

“그래요. 어떻게 모를 리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감히 이 법령을 위반했다는 말이냐.”

“제가 보기에 이것을 명하신 이는 제우스가 아니죠. 하계의 신들과 함께 사시는 정의의 여신께서도 인간들에게 그와 같은 법은 정하지 않으셨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당신의 포고가 그만큼 강력하다고 생각지도 않아요. 기록되진 않았지만 확고한 신들의 법을 필멸의 존재가 넘어설 수는 없지요.”


안티고네의 이 외침은 많은 사람들에게 법을 앞세운 폭정에 맞선 저항의 상징이 됐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는 “우리의 투쟁을 상징하는 인물은 안티고네였다”라고 말했다.


크레온과 안티고네의 충돌은 총회 선거 후보를 놓고 불법 선거 원흉과 어리숙한 피의자의 충돌처럼 전면적이다. 중년 남자와 젊은 여자, 국가의 법과 가족의 의무, 권력자의 명령과 도덕적 저항 사이의 대립에 제3의 길은 없는 것 같다. 만일 안티고네의 행동이 법을 무시한 한 여인의 죽음으로 끝났더라면 ‘안티고네’는 가족을 위한 희생 이야기로 그쳤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안티고네의 ‘경건한 범행’이 낳은 파국의 규모는 훨씬 더 크다. 


이재명 관련 사건 관련 피의자들처럼 그녀의 죽음은 또 다른 죽음들을 부른다. 오빠의 시신에 흙을 뿌리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안티고네는 동굴 감옥에 갇힌 뒤 목을 매어 자살한다. 뒤따라온 그녀의 약혼자이자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은 통치자에 대한 복종을 전부로 아는 아버지를 저주하며 칼로 자신의 배를 찌른다. 아들의 죽음에 실의한 크레온의 아내는 아들을 죽인 아버지에게 분노하며 자결한다. 힘없는 여인의 불복종에 광분하며 그녀의 도덕적 저항을 무자비하게 짓밟으려 했던 크레온의 강압적 태도는 부메랑이 되어 그를 쓰러뜨렸다. 아들과 아내를 동시에 잃고 그는 ‘산 송장’이 되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 있겠다. 


‘조국을 배반한 오빠의 시신을 왕명을 어기며 매장하는 일이 자신의 젊은 목숨을 내걸 만큼 중대한 일이었을까.’ 


하지만 안티고네라면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가족이 무덤도 없이 새들과 개들의 먹이가 되고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도록 내버려 두는 게 옳다는 말인가.’ 


마찬가지로 총회장을 거친 당연직 총회 선거관리위원장도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총회 지도자의 품위와 의무조차 품을 수 없는 총회선거법이라면 그것이 지키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말했다.


"나는 3·1운동과 더불어 태어났다. 동아일보 창간과 같은 해였다. 수많은 교육기관도 그즈음에 탄생 됐다. 연희, 이화, 숭실, 고려대학도 그랬다. 그때부터 대한민국의 뿌리가 내리기 시작했다. 내가 열네 살에 중학생이 되었을 때 부친이 남겨준 말씀이다. '네가 지금부터 긴 인생을 살아가겠는데 항상 가정 걱정만 하면 네가 가정만큼밖에 자라지 못한다. 친구들과 좋은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면 그 직장의 주인이 되고 그만큼 사회의 지도자가 된다. 그러나 언제나 민족과 국가를 걱정하는 사람은 민족 국가의 지도자가 되는 법이다'라는 교훈이다. 지금도 나는 부친의 가르침이 그 시대의 요청이었고 나라 사랑의 마음이라고 믿는다. 세대는 바뀌고 세월은 흘렀으나 그 정신이 민주국가의 길이다. 진실과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진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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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모처럼 진리와 총회와 총신을 사랑하는 무흠의 목사를 총회 지도자로 세우는 기회를 맞았다. 이 기회를 이용해 110년 총회를 상비부는 그대로 두고 총회 본부만 팀 체제로 확 바꿨다. 이어서 특보 팀 전횡을 이끈 어설픈 김종혁 체제를 넘어 전통적인 보수 교단의 칼빈주의 총회와 총신으로 세우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1-32


2025-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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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110년 총회 선거와 안티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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