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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42_ 교회 포기한 군대
Divi Ambrosii Episcopi Mediolanensis Omnia Opera 교회 포위한 군대 이상한 것을 이상하다고 말하면 안디는 이상한 세상이 됐다. 그래서 바름을 이야기한다고 뒤집어 이야기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덩달아 그것을 듣는 사람도 수를 더해 가고 있다. 거꾸로 사는 세상이니, 막 쪄낸 찐빵이니, 베 짜는 하나님이니 하는 변설로 진리를 낯설게 만든다. 신학교를 들어 간 사람이 갑자기 목사 될 필요성을 못 느껴 신학교를 그만두었단다. 그리고 믿음대로 살기 위해 바로 살아야 될 세상을 거꾸로 살아야 된단다. 어느 넋이 빠진 친구는 목사 안수를 받은 날 가슴이 하도 허전해 실컷 술로 채웠단다. 이따위 수작의 대가는 역시 니체였다. 그가 얼빠진 눈망울로 종종 되뇌인 말이 선한 악이니 악한 선이니였다. 성경은 말씀하신다. 악은 악이고, 선은 선이라고. 성경에서는 의적 일지매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도둑은 도둑이고 의인은 의인이다. 어찌 의로운 도둑이 있을 수 있으며 악한 의인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암브로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세상의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었다. 많고 강한 게 판단의 가름끈이 되고 있었다. 신자들마저도 그 수가 늘어감에 따라 성경이 아니라 세상 풍조를 따르는 경향이 짙어졌다. 니케아 신앙을 지지하는 암브로스는 아리우스파에 대한 어떤 지원도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성경대로 ‘예’와 ‘아니오’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그가 유스티나 황후의 부탁을 거절한 까닭은 솔직히 아리우스주의가 그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아리우스주의가 고트족의 신앙이었기 때문이다. 고트족은 아리우스파가 로마 제국에서 온갖 힘을 다 쓰던 시절에 파송한 선교사들이 개종시킨 야만인들이었다. 그 후 로마 제국의 대부분이 니케아 신앙을 받아들였다. 반면에 이성과 논리에 근거해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아리우스주의는 야만인들에게 전파됐다. 그 결과 아리우스주의자는 미개인이나 야만인을 의미하게 됐고 니케아주의자는 로마인을 뜻했다. 황후는 여타 야만인들로부터 로마 제국을 방어하기 위해 야만인들을 용병으로 고용하고 있었다. 아리우스 신앙을 지닌 이를 야만인 병사들을 위해 그녀는 밀란에다 예배당을 하나 마련해주고 싶었다. 암브로스는 딱 잘라 거절했고 그녀가 바랬던 교회를 그를 따르는 사람들로 채워버렸다. 화가 치밀 대로 치민 황후는 야만인 군대를 보내 그 교회를 포위하게 했다. 군인들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면서 암브로스는 신자들에게 자신이 작곡한 찬송가를 부르도록 가르쳤다. 사실상 암브로스는 라틴 찬송가의 아버지로 불리운다. 병사들은 살기를 번득이며 공격 명령을 기다렸다. 온 밀란 시민이 숨을 죽이며 사태를 주시했다. 싸움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유스티나 황후는 지휘봉을 손에 쥐고 교회 정문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암브로스 ‘네까짓 게 버텨봤자 별수 있겠어. 이제 무릎을 꿇을 거야’ 하며 그녀는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녀는 짐짓 일그러뜨린 얼굴에 묘한 웃음까지 짓고 있었다. 그때 숨 막히는 정적을 깨고 교회에서 찬송을 부르는 회중의 힘찬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아연했다. 어찌됐던 그녀도 신자였다. 황후는 찬송부르는 회중에게 공격 명령을 내릴 심장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암브로스가 이겼다. 2021-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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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32 - 쳇바퀴 세상
Sylvester I and Constantine 쳇바퀴 세상 신문을 펼쳐 든다. 날마다 그렇듯 오늘도 사건으로 지면은 그득하다. 10대 소녀가 괴성을 지르다 밟히고 밟혀 눈이 개개풀어진 사건, 미국 대통령 예비선거, 이주일 귀국, 다리 저는 국회의원이 목욕하고 나오다 칼 맞은 일, 이북에서 올까 싶은 목사들 이야기, 이스라엘 레바논 폭격으로 악명 높은 헤즈볼라의 책임자 무사위가 콩가루 된 사건. 주후 325년에 신문이 있었다면 콘스탄틴 황제가 주최한 니케아 총회를 대서특필했으리라. 한국전쟁 참전을 결의한 유엔총회에 비교가 안 되게 신문지면을 꽉 채웠을 것이다. 이런 소식이 공해로 하늘에 구멍 뚫리는 기사나 국회의원 선거 시사 나부랭이보다 얼마나 좋을 것인가. 어제와 같은 하루의 일과가 시작됐다.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틴은 기지개를 펴며 침소에서 일어났다. 햇살은 밝았다. 만찬 석상에서 박해 때 눈이 뽑혀 애꾸가 된 감독의 눈 자국에 입맞춤했던 정경이 떠올랐다. 만찬장에 감동의 박수가 넘쳤다. 황제는 빙긋 웃음을 흘렸다. 니케아 총회가 파한 뒤 총대들이 콘스탄틴에게 활동결과를 보고했다. 그러나 연로한 아리우스를 비롯한 다섯 총대들은 니케아 신조에 서명을 거부했고 유배를 당했다. 이게 난관을 전부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그리스도와 성부의 관계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토의는 해를 거듭해 한 시대를 넘어 계속됐다. 추방당했던 감독들이 의기양양하게 돌아왔고 반대로 아다나시우스가 유배당했다. 인생은 죽기 마련이다. 세월이 흘러 임종 무렵에 세례를 받은 콘스탄틴 황제가 숨을 거뒀다. 세 아들이 뒤를 이었다. 고구려의 독재자 연개소문이 죽은 뒤 일어났던 꼴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이미 오래 전에 본을 보이고 있었다. 황제의 아들들은 황제 자리를 놓고 아귀다툼을 했다. 어렸을 때 그리도 친했던 형제들이었는데 권력 앞에서는 모두가 철천지원수였다. 역사를 보노라면 지금의 사태는 아무 것도 아님을 느끼게 된다. 그에 곁들여 아리우스파와 니케아파의 팽팽한 신념들이 이방원의 넋두리마냥 칡넝쿨처럼 얼키고 설켜 맴돌았다. 승리한 쪽이 반대파의 감독들을 유배시켰다. 심지어는 기독교 신자끼리의 싸움을 종식시키고자 콘스탄틴(세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알렉산드리아에 파송했던 연로한 메신저도 유배를 당했다. 유배당한 사람은 세 아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항의를 전달했다. “나는 당신 할아버지 치하에서 박해를 받았습니다(콘스탄틴 황제의 아버지는 디오클레티안 치하 때 부황제들 가운데 하나였다). 당신이 날 박해하려고 한다면 진리를 부인하기보다는 박해를 달게 받을 것이오. 하지만 이건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당신에게는 제국을 주고 우리에게는 교회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셨음을 말이오. 우리가 정권을 탈취한다면 그건 우리가 하나님을 반대하는 게 될게요. 그러나 당신이 교회에 간섭하신다면 당신은 보통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이 말은 니케아파의 지도자가 아리우스파 황제에 대항해 말했다. 드디어 니케아파가 완전히 승리하는 날이 왔다. 더 이상 그런 소모성의 싸움들을 방지하기를 바라는 황제들이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칙령을 발했다. 2020-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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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제육 계명 살인
Cain slaying Abel by Peter Paul Rubens Lesson XVIII제육 계명 살인Sixth Commandment Murder 2018년 3월 2일 방송된 SBS 궁금한 이야기 Y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의 변호사 인생 중 가장 한 맺힌 사건으로 알려진 엄궁동 부녀자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쳤습니다. 지난 1990년 1월 4일, 부산 엄궁동 낙동강 주변 갈대숲에서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모습의 시신 한 구가 발견됐습니다. 성폭행을 당한 후 둔기로 머리를 가격당해 두개골이 함몰된 채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현장에는 범인을 단정할 수 있는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피해자를 알아본 결과 인근 지역에 살고 있던 삼십대 여성 김 모 씨였습니다. 피해자와 함께 있던 그녀의 애인은 2명의 범인과 격투 끝에 도망을 쳤고 늦은 밤이어서 가해자의 인상착의 등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미제 사건으로 남을 줄 알았던 엄궁동 살인사건의 범인은 뜻밖의 사건을 통해 검거됐습니다. 1991년 11월 경찰을 사칭해 금품을 갈취했던 2인조 강도사건이 발생했는데 범행 수법과 장소가 부산 엄궁동 2인조 살인사건을 떠올리게 했다는 것입니다. 경찰은 2인조 강조를 범인으로 체포했고 그들 역시 순순히 범행일체를 자백했습니다. 그런데 27년이 지난 지금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던 그들이 무죄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자백을 했던 것은 경찰의 고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짓 자백을 했다고 밝혔습니다. 당시에 이 사건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는 문재인 대통령이었습니다.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 장동익씨는 이날 방송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변호사 시절 보낸 편지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편지에는 “내 생각에 어떻게 해서든지 재심이 열리기만 한다면 동익씨의 억울함을 밝힐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라는 내용이 담겨있었습니다. 이들이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는 바로 장동익 씨의 좋지 않은 시력상태였습니다. 장 씨는 시각 장애 1급 장애인으로 근거리의 사물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안 좋은 시력을 지녔습니다. 불빛 하나 없는 캄캄한 밤에 강으로 사람을 끌고 가서 돌로 피해자의 머리를 가격하여 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입니다. 27년이 지난 지금 무죄를 주장하는 장 씨는 진실을 밝힐 수 있을까요. 21년 만에 만난 딸에게 장 씨는 말했습니다. “너는 살인자의 딸이 아니다. 너에게 평생 따라다녔을 살인자의 딸이라는 누명을 꼭 지워주겠다.” 장 씨는 또 이렇게 말을 이었습니다. “내 딸을 만나러 오는데 걸린 시간은 21년하고도 5개월, 그러나 딸은 제 방에서 나올 생각을 않습니다. 우리를 이렇게 만든 저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래도 분노에 잡아먹히지 않을 것입니다. 저 아이의 상처는 내가 누명을 벗는. 거기서 치유될 것입니다.” 장 씨가 진실을 밝히고 27년 만에 무죄를 입증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하지만 대법원까지 이어졌던 재판에서 유죄 판결은 바뀌지 않았으며 결국 이 사건은 문 대통령이 변호사로 지냈던 35년 동안 가장 한스러운 사건으로 남았다고 합니다. 가인이 자신의 동생 아벨을 죽인 이후 인간은 살인을 끊임없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볼 때 살인은 매우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살인이라는 말 자체가 누구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산상수훈에서의 예수님의 가르침은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살인이란 단지 외적인 행동일 뿐이고 십계명도 그런 행동만을 지적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의미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39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THOU SHALT NOT KILL. 39. The purport of this commandment is that since the Lord has bound the whole human race by a kind of unity, the safety of all ought to be considered as entrusted to each. In general, therefore, all violence and injustice, and every kind of harm from which our neighbour's body suffers, is prohibited. Accordingly, we are required faithfully to do what in us lies to defend the life of our neighbour; to promote whatever tends to his tranquillity, to be vigilant in warding off harm, and, when danger comes, to assist in removing it. Remembering that the Divine Lawgiver thus speaks, consider, moreover, that he requires you to apply the same rule in regulating your mind. It were ridiculous, that he, who sees the thoughts of the heart, and has special regard to them, should train the body only to rectitude. This commandment, therefore, prohibits the murder of the heart, and requires a sincere desire to preserve our brother's life. The hand, indeed, commits the murder, but the mind, under the influence of wrath and hatred, conceives it. How can you be angry with your brother, without passionately longing to do him harm? If you must not be angry with him, neither must you hate him, hatred being nothing but inveterate anger. However you may disguise the fact, or endeavour to escape from it by vain pretexts. Where either wrath or hatred is, there is an inclination to do mischief. If you still persist in tergiversation, the mouth of the Spirit has declared, that “whosoever hateth his brother is a murderer,”(1 John 3:15); and the mouth of our Saviour has declared, that “whosoever is angry with his brother without a cause shall be in danger of the judgment: and whosoever shall say to his brother, Raca, shall be in danger of the council: but whosoever shall say, Thou fool, shall be in danger of hell fire”(Mt. 5:22).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육 계명 살인하지 말지니라 출 20:13 39. 이 계명의 목적은, 주께서 인류 전체에 일종의 통일성이 있도록 한데 묶어 두셨으므로 우리는 각각 전체의 안전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이웃의 신체를 해할 일은 폭행, 상해 기타 어떤 것이든지 일체 금지하십니다. 따라서 이웃의 생명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충실히 이용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들의 평화에 도움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라, 해로운 것이면 막아내라, 이웃이 위험한 처지에 있으면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입법자로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우리는 동시에 그는 이 원칙으로 우리의 영혼을 인도하려 하신다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마음속의 생각을 보시며 특히 그것을 중시하시는 분이 육체에만 진정한 의를 가르치신다면, 그것은 우스운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마음으로 살인하는 것을 금하며, 형제의 생명을 구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라고 명령하십니다. 참으로 살인은 손이 낳는 것이지만, 마음이 분노와 증오심에 감염될 때에 살인을 잉태합니다. 형제에 대해서 노하면서 그를 해하려는 욕망이 치밀어 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형제에 대해 노하지 않는다면 미워할 수도 없습니다. 증오심은 지속되는 분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분노나 증오심이 있는 곳에는 해를 주려는 의도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수단으로도 감출 수 없고 피할 수도 없는 사실입니다. 당신이 계속 변명할지라도 성령께서는 이미 “마음속에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요일 3:15)고 선언하셨고, 주 그리스도께서는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고 선언하셨습니다. 칼빈의 살인에 대한 가르침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다. 즉 목숨을 죽이는 것만이 살인의 전부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과 태도도 문제를 삼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성내는 것뿐만 아니라 모욕하는 말조차 살인에 버금가는 죄가 됩니다. 라가라 하는 말의 원래 뜻은 비었습니다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라가(raca)를 사용해 욕을 하게 되면 속이 빈 놈이나 정신 나간 놈이라는 뜻으로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련한 사람이라 하는 말의 원어 모로스(moros)는 바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 말들은 도덕적으로 바보이거나 정신 나간 사람을 의미합니다. 즉 바보짓을 하거나 정신 나간 짓을 하는 사람을 빗대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들을 듣는 사람은 마음과 명예에 심한 상처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비방하거나 모욕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제육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주십니다. 주님의 이 가르침은 우리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밝혀주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고 투덜대고 비방하고 무시하는 말을 함부로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그러한 행위가 살인을 저지르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주님께서 말씀해주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마 5:43-45 우리는 이웃 사랑과 기도로 자신을 다스려 제육 계명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2020-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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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세계 교회사 31 - 니케아 신조
니케아 신조 아마 직전 총회장이셨던 것 같다. 그는 두루마기 차림의 설교 중에 찬송가를 자작하여 부르시는 목사님이셨다. 우리 교단 가장 큰 교회의 목사님이시기도 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총회장이셨다. 그가 이제 바로 뒤를 이은 총회장한테 나무망치와 받침을 물려주고 증경 총회장이 되어 바깥으로 나오셨다. 몇 분 총대 목사님이 이 증경 총회장과 맞닥뜨렸다. 그들의 만남과 대화는 여느 청년들이 모여 노닥거리는 모양과 진배없었다. 햇병아리 신학생의 눈에는 진기한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거기에는 진솔한 인간의 모습이 우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요즘의 세태처럼 권력과 부귀와 장수 나부랭이보다는 지혜를 하나님께 구한 솔로몬 왕이 이렇게 말했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 그런데 주 후 325년 니케아에서 인간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 발생했다. 다시 말해 해 아래 새로운 일이 일어났다. 바벨탑 이래 인간들이 모이면 쓰잘 데 없는 일을 일삼기 일쑤인데 니케아 총회에서는 전혀 달랐다. 인간들이 웅성웅성 모여 인류 최초로 신에 대한 협의와 결정을 내렸다. 니케아 총회는 부활절 날짜를 결정했다. 부활절은 봄이 시작되고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 이후 첫 번째 보름달이 지난 첫 번째 주일로 결정했다.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과 그리스도인의 관습이 짬뽕 된 것이었다. 의견이 분분했던 부활절이 확정됐다. 이어서 니케아 총회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논란도 종지부를 딱 찍었다. 이것은 아다나시우스의 의견을 따라서 결정되었다. 이로써 아리우스의 해괴한 주장은 빛을 잃고 불가사의한 삼위일체는 번쩍거리게 되었다. 이 내용을 담은 걸 니케아 신앙고백이라고 한다. 물론 이 신조가 몇 년 뒤에 작성되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니케아 신앙고백이라고 하는 것은 그게 니케아 총회의 사상을 참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게 영국 공동기도서에 번역되어있는 걸 한글로 옮기면 이렇다. “나는 하늘과 땅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만물의 창조주 전능하신 한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독생 성자이시며 만세 전에 성부와 함께 계셨고 하나님의 하나님, 빛의 빛이시며 참되신 하나님의 참되신 하나님이신, 나셨지만 만들어지지 않으셨고, 성부와 한 속성을 지니셨고, 만물을 만드셨고, 우리 인간을 위해 우리 구원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그리고 동정녀 마리아의 성령을 통해서 인간이 되신 한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예수님은 본디오빌라도 치하에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고난을 받으사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예수님은 성경 말씀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오르사 성부 오른쪽에 앉아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입니다.나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 생명의 주와 수여자이신 성령님을 믿습니다.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며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2020-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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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제오 계명 효도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Lesson XVII제오 계명 효도Fifth Commandment Flial Duty 부모님과 함께하면 돌아보니 가시밭길 그 길이 꽃길이었습니다. 부모님과 같이 걸으면 아픈 돌팍길 그 길이 비단길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옆에 계시면 캄캄해 무서웠던 길 그 길이 빛으로 나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부모님과 함께한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과 같이 부르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리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이 옆에 계신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입니다. 부모님과 보고 싶은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불멸의 춤은 아직 추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이 옆에 계시지 않을 때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이고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그때 내가 부모 되어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까요. 부모님과 같이 걷지 않아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인생 여행의 시작일까요. 2016년 tvN에서 방영한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2016)는 노년의 삶을 인상 깊게 그려냈습니다. 마지막 방송이 나간 후 노희경 작가는 블로그에서 이런 소감을 적었습니다. “작가가 되어서 이렇게 잔인해도 되나. 드라마의 결말을 쓰며, 내 잔인함에 내가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포장해도 이 드라마의 결론은 부모님들, 자식들에게 의지하지 마세요, 우리 살기 바빠요, 그리니 당신들은 당신들끼리 알아서 행복하세요, 우리는 이제 헤어질 시간이에요, 정 떼세요, 서운해 하지 마세요, 어쩔 수 없잖아요, 그건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부모에게 쓰는 내내 끝난 후에도 참 많이 미안했다.” 독일 여성감독 도리스 되리의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원제 Cherry Blossoms 벚꽃 Hanami 꽃놀이)에 이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늘 일본에 가보고 싶었다. 후지산과 벚꽃을 그와 함께 꼭 한번 보고 싶었다. 남편없이 구경하는 건 상상할 수가 없다.” 이 영화의 첫 번째 대사이자 아내 트루디의 말입니다. 남편 루디와 함께 일본 후지산의 벚꽃을 보고 싶었다고 독백하던 아내 트루디는 남편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의사로부터 전해 듣습니다. 그래서 멀리 산다는 핑계로 한동안 보지 못했던 자식들을 볼 겸 여행을 제안하죠. 베를린에 도착한 부부는 아들 내외와 손자 손녀가 사는 집으로 갑니다. 반가움도 잠시 아이들은 각자 게임에 빠져있고, 아들 내외 그리고 뒤이어 도착한 딸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죠. “왜 온 거야. 시간 없는데…” 그래도 오랜만에 모인 가족이니 시간을 내 시내 구경도 하고 함께 사진도 찍고 식사도 하죠. 하지만 부모는 이미 너무 커버린 자식들이 버겁고 자식은 이제 귀찮아진 부모와 같이 있는 시간이 불편합니다. 부부는 자식에게 폐 끼치는 것 같은 느낌에 자리를 뜨죠. 자식들은 그런 부모를 보며 화를 냅니다. 그러곤 돌아서서 죄책감에 눈물짓습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왜 그렇게밖에 말하지 못하는지... 그들의 행동을 눈치챈 트루디는 자기들만의 여행을 바다로 가자고 루디를 보챕니다. 도착한 발트해 파도소리에 잠을 못이루겠다고 불평하는 루디. 그리고 그런 루디를 타이르며 함께 춤추고 즐기길 원하는 트루디. 그날 밤을 그렇게 지새고 어젯밤 시끄럽게 쳐대던 파도소리가 고요해졌다며 아내 트루디를 깨우던 루디. 그러나 그 파도처럼 루디는 고요하게 잠들어 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또 가족이 모이게 됩니다. 도쿄에 거주하던 막내아들까지요. 자신을 희생해가며 가족들을 아껴봐 주던 아내였기에 루디의 슬픔은 더욱더 큽니다. 장례를 치르는 중에 바다를 보며 그는 중얼거립니다. “정말 고요하군....” 장례식에서 자식들은 이제 와 자신이 아무것도 해 드릴 수 없음에 눈물 흘립니다. 그러면서 한편 남겨진 아버지에 대한 부담을 느끼죠. 그들은 바쁘고 엄마는 이제 없고 아버지는... 아버지는 어쩌지... 아버지 루디는 하루살이의 하루의 삶은 천국 그래서 그들의 하루 비행은 행복이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그의 그런 슬픔을 자식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아있는 것이 아버지임을 불평하고 서로에게 미루며 마치 짐이 하나 생긴 듯 행동을 취합니다. 아버지 그 이름만으로도 자녀에겐 새처럼 날개를 펴고 마음대로 날 수 있는 하늘입니다. 어머니 그 이름만으로도 자녀에겐 새처럼 날개를 접고 포근히 잠들 수 있는 보금자리인데도 말입니다. 몸빛이 검고 울음소리가 흉측하여 죽음을 알리는 새로 전 세계에 알려진 까마귀는 자기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줍니다. 그래서 까마귀를 효조(孝鳥)라고 해서 일본에서는 상당히 귀하게 여기는 까닭에 흔히 볼 수 있는 새이기도 합니다. 농경사회에서는 노쇠한 부모를 자식이 까마귀처럼 공양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현대사회에서는 그러한 의미가 좀 쇠퇴한 감이 있기는 하더라도 그 정신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모를 공경하는 효도의 의미는 물질과 육체적인 섬김은 물론이고 부모의 뜻과 생각을 존중한다는 데 더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그 의미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36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HONOUR THY FATHER AND THY MOTHER: THAT THY DAYS MAY BE LONG UPON THE LAND WHICH THE LORD THY GOD GIVETH THEE. 36. Wherefore, we ought to have no doubt that the Lord here lays down this universal rule--viz. that knowing how every individual is set over us by his appointment, we should pay him reverence, gratitude, obedience, and every duty in our power. And it makes no difference whether those on whom the honour is conferred are deserving or not. Be they what they may, the Almighty, by conferring their station upon them, shows that he would have them honoured. The commandment specifies the reverence due to those to whom we owe our being. This Nature herself should in some measure teach us. For they are monsters, and not men, who petulantly and contumeliously violate the paternal authority. Hence, the Lord orders all who rebel against their parents to be put to death, they being, as it where, unworthy of the light in paying no deference to those to whom they are indebted for beholding it. And it is evident, from the various appendices to the Law, that we were correct in stating, that the honour here referred to consists of three parts, reverence, obedience, and gratitude. The first of these the Lord enforces, when he commands that whose curseth his father or his mother shall be put to death. In this way he avenges insult and contempt. The second he enforces, when he denounces the punishment of death on disobedient and rebellious children. To the third belongs our Saviour's declaration, that God requires us to do good to our parents(Mt. 15). And whenever Paul mentions this commandment, he interprets it as enjoining obedience.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출 20:12 36.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 여기서 한 일반적 원칙을 세우셨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즉, 주의 임명으로 어떤 사람이 우리 위에 세워진 것을 알면, 우리는 그에게 경외와 순종과 감사를 드리며, 그밖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우리의 웃어른이 이런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로 그 지위에 있게 된 것이며, 이 일이 우리가 그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 낳아준 우리의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백히 말씀하십니다. 자연 자체도 이 일을 우리에게 가르칠 것입니다. 반항이나 고집으로 부모의 권위를 무시하는 자들은 사람이 아니라 기괴한 동물입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자기를 낳아 준 분들의 노고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인생의 혜택을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공경에 경의와 복종과 감사의 세 부분이 있다고 우리가 말한 것은 율법에 첨가된 여러 말씀을 보아도 분명히 올바릅니다. 주께서는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죽이라고 명령하심으로써 처음 부분인 경의를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멸시와 박대를 복수하십니다. 또 순종하지 않고 반항하는 자녀에 대해서 사형을 명령하심으로써(신 21:18-21) 둘째 부분인 순종을 강조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15장에서 부모를 후대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하신 말씀은 존경의 셋째 부분인 감사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 계명을 언급할 때마다 강제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존 스토트(John Stott)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인의 확신』(Confirmation)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 두 판을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첫째 돌판에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의무가 새겨져 있습니다. 둘째 돌판에는 이웃에 대한 인간의 의무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오 계명을 첫째 돌판에 새기셨습니다. 그 이유는 보이는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아니하는 부모이신 하나님을 공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감당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이웃들도 섬겨야 합니다. 하늘나라에 적합한 사람은 세상에서도 쓸모가 있어야 합니다. 제오 계명은 부모에 대한 의무를 지시할 때 다른 종류의 부모들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정치적인 부모(세상의 권좌에 있는 사람들) 영적인 부모(교회의 목사들) 그리고 연륜과 경험을 통한 가르침을 받아 부모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스승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오 계명이 특별히 지적하고 있는 것은 육적인 부모입니다. 제오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 위에 있게 하신 이들을 우리가 존경하고 감사하는 마음과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질적으로 권위를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도록 배우지 아니하면 나중에 정당한 권위를 부여받은 대상에게도 거역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자녀들이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경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말씀합니다. 또한 부모들도 자녀들의 마땅한 공경을 받기에 합당한 부모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을 따르는 부모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 6:4 2020-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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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세계 교회사 30 - 니케아 총회
니케아 총회 고풍스런 대전중앙교회에 모인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의 모습은 엄숙하고 경건했다. 우리 총신 신학생들은 총대들 틈에 뒤섞이니 이제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 꼴이었다. 그렇게 높게 보이던 신학부 졸업반 전도사님들도 어설퍼 보이기는 매한가지였다. 한 목사님이 손을 쳐들고 “의자앙!”하며 사회 석 앞으로 어기적 나갔다. 마이크를 손에 쥐고 발언을 했다. “에, 우리가 이렇게 성 총회로 모였으니 어찌 입씨름만 한 대서야 하나님 앞에 면목이 서겠습니까? 낮에는 회의를 하고 밤에는 부흥사경회를 열어 은혜를 받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동의가 들어오고 왁자하니 재청이 울리고 가부를 묻는 소리가 찌렁하니 예배당을 휘감았다. 기름 부음 받는 자들의 “예”하는 소리가 초등학생들 구령처럼 장내를 울렸다. 해가 뉘였거렸다. 기름 부음 받은 분들의 즐거운 저녁밥이 자위가 돌 무렵 총회에 모인 총대들이 결의한 대로 부흥사경회가 시작됐다. 가라앉은 설교자의 음성이 성령의 열매를 강조하느라 냅다 외치는 소리에 뒤이어 쿵 하며 대전중앙교회 마룻바닥을 울렸다. 일순 장내가 조용해졌다. 너나없이 무슨 소리인가 하고 두리번거렸다. 보니 한 목사님이 몸을 앞뒤로 흔들며 주무시다가 의자 밖으로 굴러떨어지신 것이었다. 나라도 하나였고 교회도 하나였는데 그리스도인의 행습은 로마 군인들처럼 일정하지가 못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명절인 부활절만 해도 그랬다. 유월절을 지키는 유대인처럼 봄에 달이 꽉 찬 날을 지키는 사람도 있었다. 이를테면 부스럼 예방한답시고 키들거리며 부럼을 까는 정월 대보름을 부활절로 지키는 셈이었다. 그런가 하면 이교도들이 자연을 지배하는 신들이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는 것을 경축했던 봄의 첫날을 부활절로 지키는 사람도 있었다. 부활주간의 부활절날도 가지각색이었다. 어떤 사람은 부활절을 일요일이라고 주장했다. 삼위일체와 이런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콘스탄틴은 주 후 325년 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근처에 있는 안양만 한 니케아 시에서 회집하는 총회를 소집했다. 이 모임을 니케아공의회라고 한다. 이건 전체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인 최초의 집회였다. 전 세계에서 감독들이 꾸역꾸역 니케아로 모여들었다. 아프리카와 시리아에서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샤에서 폰투스, 갈라디아, 밤빌리아, 길리기아, 프리지아,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아가야 및 멀고 먼 스페인 등지에서 감독들이 모여들었다. 로마에서는 사제들이 왔다. 역사가는 콘스탄틴처럼 어떤 군주가 자기의 구세주한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그토록 성대한 축제를 마련한 적이 전무후무했노라고 니케아 총회의 모임에 대해 말했다. 감독들과 사제들이 거대한 홀에 운집하여 황제를 기다렸다. 황제가 홀에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 일어섰다. 그는 하늘에서 보낸 메신저 같았다. 그의 옷을 수놓은 금과 보석들이 빛을 받아 찬란하다 못해 하얗게 빛났다. 황제는 총대들을 만찬에 초대했다. 감독들과 사제들이 줄을 지어 만찬장에 들어설 때 근위병들이 양쪽에 칼을 뽑아 들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을 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한테 경의를 표하기 위한 것이었다. 202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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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요한계시록Revelation
- 요한계시록Revelation은 오늘날 터키 해변의 작은 섬 밧모Patmos에서 사도 요한이 로마의 죄수로 갇혀 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다.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께서 실제의 일곱 교회들에 직접 보내시는 편지들로 시작한다. 이 편지들에는 칭찬과 비평과 위로가 담겨 있다. 그 뒤 악인들의 심판에 대한 일련의 긴 환상들이 이어진다. 그 환상들은 모두 아주 뛰어난 상징어로 되어 있다. 요한계시록에서 교회가 큰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 승리를 확증한다. 그 승리는 하나님께서 영원히 다스리시는 천국을 우리에게 안겨줄 것이다. 이런 시가 있다. 고향의 봄 _이원수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고향의 봄은 노래로 더 친숙한 동시다. 고향의 봄을 부를 때 우리의 눈시울이 젖는다. 고향은 태를 묻은 태어난 곳이고 가족과 친지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곳이다. 고향의 기억은 작은 보람과 기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가난마저도 풍요롭게 되살아난다. 불행의 기억은 희미해지고 행복한 기억은 새록새록 새로워지는 게 고향에 대한 기억이다. 그렇듯 신자들에게 천국은 그들의 고향이다. 우리가 천국의 개념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쉬기만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오히려 우리는 밤낮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즐겁게 살 것이다. 신자들은 모두 떠나온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신자들의 돌아갈 고향 천국에 대해 요한계시록 22:1-5에서 이렇게 전한다.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의 물이 흐르는 강을 내게 보이셨다. 그 물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 길 가운데로 흘렀다. 강 양쪽에 생명나무가 있고 12가지 열매를 달마다 맺었다. 그 나무의 잎사귀들은 모든 인류를 치료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곳에는 다시 저주가 없고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안에 있을 것이다. 그의 종들이 주를 섬기고 주의 얼굴을 볼 것이고 주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에 있을 것이다. 그곳에는 다시 밤이 없을 것이고 촛불과 햇빛이 쓸 데 없을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빛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들이 영원히 다스리리라. 2025-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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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요한계시록Reve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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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유다서Jude
- 베들레헴 유다서Jude는 예수님의 형제 유다가 쓴 편지이다. 유다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교회에 몰래 들어온 사람들에 대해 경고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그릇되게 해석하고 우리의 유일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다녔다. 유다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사람들을 계속 두려움과 사랑으로 대하면서 설득하기도 하고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기도 하라고 권면한다. 이런 시가 있다. 사랑하는 별 하나 _이성선 나도 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외로워 쳐다보면 눈 마주쳐 마음 비춰 주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도 꽃이 될 수 있을까 세상일이 괴로워 쓸쓸히 밖으로 나서는 날에 가슴에 화안히 안기어 눈물짓듯 웃어 주는 하얀 들꽃이 될 수 있을까 가슴에 사랑하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외로울 때 부르면 다가오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마음 어두운 밤 깊을수록 우러러 쳐다보면 반짝이는 그 맑은 눈빛으로 나를 씻어 길을 비춰 주는 그런 사람 하나 갖고 싶다 이 시는 어두운 밤하늘에 빛나는 별이나 사람들에게 웃음을 안겨 주는 하얀 들꽃처럼 서로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따뜻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가득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유다는 순수한 그리스도인의 가르침이 그릇된 해석으로 전파되는 곤란한 처지에 직면했다. 그것 때문에 교회 안에 분열과 혼란이 일어났다. 유다는 그런 어려움을 이기기 위하여 교인들이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외친다. 2025-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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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유다서Ju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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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요한3서3John
- 에스더의 정원 요한3서3John는 요한2서의 그리스도인의 환대에 대해 더 보충해 진술하고 있다. 요한3서는 가이오라는 이름의 한 신자를 칭찬한다. 그는 사도들의 가르침들을 따라 살았기 때문이다. 가이오는 여행하는 그리스도인 선교사들을 자신의 집에 맞아들이고 대접했었다. 요한3서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으면 자만심이 그들을 분열시킬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이런 시가 있다. 힘과 용기의 차이 _데이비드 그리피스 David L Griffith 강해지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고 부드러워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기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고 져주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 위해서는 힘이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홀로 서기 위해서는 힘이 누군가에게 기대기 위해서는 용기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힘이 살기 위해서는 용기가 사랑하기 위해서는 힘이 , 그리고 사랑받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듯 거짓 가르침을 따르지 않기 위해서는 믿음의 힘이 교회 분열을 막기 위해서는 믿음의 용기가 필요하다. 2025-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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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요한3서3J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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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요한2서2John
- 야자수 요한2서2John는 선택받은 부인과 그녀의 아들딸들에게 보낸 편지다. 그녀의 집은 교제와 예배를 위해 만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열려 있었다. 요한2서는 요한1서에서 말한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 똑같이 경고한다. 사도 요한은 그녀가 그리스도인을 환대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말했다. 거짓 선생들은 요한의 가르침을 받는 신자들을 꼬드기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의 친절과 환대를 나쁘게 이용했다. 요한의 편지는 이 위험에 대해 말하고 이러한 신앙의 파괴자들에게 집을 개방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런 시가 있다. 여섯 가지 참회_젠드 아베스타 내가 생각해야만 하는 데 생각하지 않은 것 말해야만 하는 데 말하지 않은 것 행해야만 하는 데 행하지 않은 것 그리고 내가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데 생각한 것 말하지 말아야 하는 데 말한 것 행하지 말아야 하는 데 행한 것 그 모든 것들을 용서하소서 요한은 요한1서와 마찬가지로 진리와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그것에 더해 신자들이 피해야 될 세 가지 위험을 지적한다. 첫째 위험은 진리를 알고 있지만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다. 둘째 위험은 진리를 실천하지만 그것을 옹호하지 않는다. 셋째 위험은 진리를 지나쳐 넘어간다. 사실 진리는 아무리 약하게 보일지라도 진리는 언제나 강하다. 그러나 거짓은 아무리 강하게 보일지라도 거짓은 언제나 약하다. 2025-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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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요한2서2J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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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요한1서1John
- 야자수와 장막 요한1서1John는 성육신의 진리에 관해 권위있게 말한다. 거짓 선생들이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신성과 인성을 부인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확신할 때 구원의 기쁨을 체험할 수 있고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시가 있다. 구도자의 노래 _까바르 살아 있는 동안 손님을 맞이하라 살아 있는 동안 경험 속으로 뛰어들고 살아 있는 동안 삶을 이해하라 그대가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은 죽음이 오기 전에만 가능한 일 살아 있는 동안 밧줄을 끊지 않는다면 죽은 뒤에 어떻게 자유를 얻겠는가 육체가 썩은 다음에야 영혼이 하나님과 결합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착각이 아닐 수 없다 지금 하나님을 발견하라 지금 하나님을 찾지 못한다면 그대 갈 곳은 죽음의 도시뿐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라 그러면 이다음에도 하나님과 하나가 되리라 사도 요한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세 가지 방법을 가르친다. 첫째 하나님은 빛이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빛 안에서 걸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사랑 안에서 걸어야 한다. 셋째 성령은 진리이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진리를 믿고 진리에 복종해야 한다. 홀로 외로이 천국에 가려고 노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러나 홀로 돌아다니는 곰이나 사자와 같은 동물과 신자를 비교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이 점에 있어서 양들이다. 양들은 함께 있기를 좋아한다. 양들은 떼를 지어 다닌다. 하나님의 백성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2025-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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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요한1서1J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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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베드로후서2Peter
- 베드로의 닭 베드로후서2Peter를 쓸 때 베드로는 죽음이 얼마 안 남고 교회가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짓 선생들이 교회 안에 몰래 숨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복음을 왜곡했다. 그는 복음의 진리가 이단을 막는 예방백신이고 이단에 대한 해독제라고 주장한다. 복음은 어두운 곳을 밝히는 등불이다. 이런 시가 있다. 죽음이 집에서 나를 기다린다 _주전 1900년경 이집트 파피루스에 적힌 시 죽음이 오늘 내 앞에 있다 병의 회복 같은 고통 뒤의 산책 같은 죽음이 오늘 내 앞에 있다 몰약 향기 같은 바람 부는 날의 천막 아래 휴식 같은 죽음이 오늘 내 앞에 있다 연꽃 향기 같은 취기의 웃음 속 휴식 같은 죽음이 오늘 내 앞에 있다 비 온 뒤 걷는 길 같은 오랜 전쟁 뒤의 집으로의 귀가 같은 죽음이 오늘 내 앞에 있다 구름 낀 하늘이 개는 것처럼 알지 못하는 어떤 것에의 열망 같은 죽음이 오늘 내 앞에 있다 오랜 속박의 긴 해들을 지나 자신의 집을 다시 본 기쁨 같은 모든 나쁜 것들을 잊고 행복에 대해 명상하라 침묵을 사랑하는 그 나라에 이를 때까지 죽음이 오늘 내 앞에 있듯 신자들은 하나님의 귀중한 말씀을 굳게 붙들고 영적으로 자라야 한다. 그래서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 거짓 선생들을 알아보고 피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약속을 마음속에 소망으로 간직하고 지켜야 한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영적 지혜를 강조했다. 베드로가 1세기에 주의 재림이 그의 시대에 얼마 안 남았다고 느꼈다면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주의 재림을 어떻게 생각해야 될까. 2025-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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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하박국Habakkuk
- 하박국Habakkuk의 예언은 모든 선지서 가운데 아주 독특하다. 그것은 높은 수준의 히브리어 시를 담고 있다. 하박국의 이름은 포용을 뜻한다. 하박국은 바빌론의 임박한 침략을 내다봤다. 이런 시가 있다. 한 번에 한 사람 _마더 테레사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 번에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단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따라서 당신도 시작하고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난 한 사람을 붙잡는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면 난 4만 2천 명을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노력은 단지 바다에 붓는 한 방울 물과 같다 하지만 만일 내가 그 한 방울의 물을 붓지 않았다면 바다는 그 한 방울만큼 줄어들 것이다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다 당신의 가족에게도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지 시작하는 것이다 한 번에 한 사람씩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그의 선민을 징벌하시려고 악한 나라를 사용하시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하박국은 자신의 체험을 세 단계로 묘사한다. 첫째 단계는 믿음의 흔들림이다. 둘째 단계는 믿음의 비전이다. 셋째 단계는 믿음의 인내다. 하박국이 강조하는 말씀은 2장 4절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리라 하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로마서 1장 17절, 갈라디아서 3장 11절, 히브리서 10장 38절 등에서 인용되었다. 로마서의 주제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롭게 되는가이다. 갈라디아서의 주제는 의인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말한다. 히브리서의 주제는 믿음으로 사는 삶을 강조한다. 이렇듯 신약 성경의 세 서신서가 구약 성경 하박국의 한 본문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한 의인의 삶이란 마더 테레사의 시처럼 한 번에 한 사람씩만 사랑하고 껴안고 바라보는 것을 단지 시작하기만 해도 될 것이다. 2024-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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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하박국Habakk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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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나훔Nahum
- 나훔Nahum은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의 심판이 급박하다는 것을 선포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니느웨는 회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세기 뒤 니느웨로 파송된 요나의 외침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게 했다. 이런 시가 있다. 바람만이 알고 있지 _밥 딜런 얼마나 더 많은 길을 걸어야 한 사람의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바다 위를 날아야 흰 갈매기는 사막에서 잠들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이 머리 위를 날아야 포탄은 지상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지 바람만이 알고 있지 얼마나 더 고개를 쳐들어야 사람은 하늘을 볼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귀를 가져야 타인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죽어야 너무 많이 죽었음을 깨닫게 될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지 바람만이 알고 있지 얼마나 많이 그 자리에 서 있어야 산은 바다가 될까 얼마나 더 오래 살아야 사람들은 자유로워질까 얼마나 더 고개를 돌리고 있어야 안 보이는 척할 수 있을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지 나훔서 예언의 목적은 두 가지다. 첫째는 니느웨의 심판과 멸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둘째는 앗수르의 약탈과 횡포에 떠는 유다 백성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나훔의 예언은 아주 단순하다. 그것은 니느웨의 멸망에 집중되어 있다. 니느웨는 주전 612년 메디아와 바빌론에 멸망당했다. 나훔의 이름은 위로라는 뜻이다. 나훔의 사명은 앗수르에 멸망한 이스라엘에 이어 유다 왕국에 대한 잔인한 앗수르인들의 위협을 경고하고 유다 백성을 위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선포한다. 그러나 그들은 나훔 선지자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실제로 니느웨는 주전 612년에 멸망했다. 2024-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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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나훔Nah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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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미가Micah
- 낙타와 양 미가Micah는 이사야와 호세아와 같은 시대 사람이었다. 미가의 이름은 주와 같으신 이가 누구입니까 라는 뜻이다. 그는 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해 예언했다. 미가서는 이사야서의 자매 책이다. 미가서는 이사야서의 요약이다. 미가 선지자는 그의 책에서 세 가지 메시지를 전한다. 다가올 심판과 미래의 왕국과 하나님의 회개 요청이다. 미가는 유다 백성이 이스라엘의 슬픈 체험을 통해 교훈 받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들은 교훈을 받지 않았다. 이런 시가 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_킴벌리 커버거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않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아니 그런 것들은 잊어 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으리라 그 대신 내가 가진 생명력과 단단한 피부를 더 가치있게 여겼으리라 더 많이 놀고 덜 초조해 했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아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 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리라 내가 만나는 사람을 신뢰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입맞춤을 즐겼으리라 정말로 자주 입을 맞췄으리라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 했으리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사실 이 시를 쓴 저자 자신이 이렇게 살지 못했기 때문에 이 시를 썼다. 그러나 선지자는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의 삶을 산다. 그래서 선지자 미가는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를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이 듣고 변화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았고 변하지 않았다. 미가의 예언이 자비와 소망이 담긴 심판의 메시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2024-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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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미가Mic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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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요나Jonah
- 리워야단 요나Jonah의 이름은 비둘기를 뜻한다. 대체로 비둘기는 평화와 온순과 순결 등을 상징한다. 그러나 요나는 그 이름의 뜻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이런 시가 있다. 의족을 한 남자 _제임스 테이트 한쪽 다리에 의족을 한 남자가 감옥을 탈출하다가 붙잡혔다 간수들은 그의 의족을 빼앗아 버렸다 날마다 그는 한쪽 다리를 한 채로 언덕을 넘고 강을 건너 밭에 가서 강제 노동을 해야만 했다 일 년이 지나 크리스마스이브가 되자 간수들은 그의 의족을 돌려주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더 이상 의족이 필요 없었다 그는 이미 완벽한 탈출 계획을 세웠기에 한쪽 다리로 탈출하는 계획을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가를 보는 눈은 감상적인 눈이 아니라 불처럼 타오르는 눈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사람의 영혼은 삶의 여러 장애로 눈이 어두워지기도 하지만 삶의 의욕을 포기할만큼 어리석지 않다. 그렇듯 선지자 요나는 자신의 삶을 포기할만큼 의지가 약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을 피해 도망간다. 그는 그 길의 끝에서 하나님의 뜻을 피할 수 없음을 발견한다. 그는 아무런 의심 없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풍랑이 넘실대는 바다에 빠진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큰 물고기 속으로 빨려들어 간다. 그러나 그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믿음의 기도를 통해 구원을 체험하게 된다. 마침내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믿음의 종이 된다. 요나서의 주제는 요나 개인과 선원들과 앗수르 이방 국가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모두의 생명을 위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인자와 사랑이다. 2024-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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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요나Jo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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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오바댜Obadiah
- 오바댜Obadiah는 그의 이름을 빼고는 알려진 게 하나도 없다. 오바댜는 히브리어로 주의 종이라는 뜻이다. 그는 한 개인으로보다는 하나님의 선지자 역할로 기억되는 걸 더 좋아했던 것 같다. 오바댜라는 이름의 다른 사람이 구약 성경에 12명이나 더 있다. 바빌로니아인들이 예루살렘을 파괴했을 때 에돔인들은 기뻐했다. 오히려 에돔인들은 그들의 이웃 형제를 돕지 않고 적을 거들었다. 그러한 양상은 옛날 이삭의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의 대립이 다시 반복되는 것이었다. 히브리어로 붉다는 뜻을 지닌 에돔은 이삭의 맏아들 에서에게 붙여진 별명이었다. 에서가 그의 동생 야곱이 주는 붉은 수프의 값으로 맏아들 상속권을 주고 사먹었기 때문에 얻은 별명이다. 이로 말미암아 생긴 야곱과 에서의 대립은 영혼과 육체 사이의 싸움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런 시가 있다. 엄마야 누나야 _김소월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들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서로가 하나님의 자녀와 형제라는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멸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바댜는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이스라엘을 예언하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이 오바댜의 예언대로 적들의 소유물들을 소유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빌론이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불태울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적을 불태우기 위한 불이 되고 그 나라는 주의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갈잎의 노래가 들리는 강변에서 사는 엄마와 누나와 형제가 함께 사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2024-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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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오바댜Obadi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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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아모스Amos
- 짐실은 노새 아모스Amos는 목자와 농부였지만 글을 쓴 최초의 선지자였을것이다. 그래서 아모스는 정식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아모스서에는 목가적인 비유들이 많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강하게 전했다. 아모스의 예언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사치와 부패의 본거지 벧엘에서 주로 선포되었다. 그는 권력자와 부자의 배교와 불의를 공격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겉치레나 망설임이 결코 없었다. 이런 시가 있다. 어디로 _최하림 황혼이다 어두운 황혼이 내린다 서 있기를 좋아하는 나무들은 그에게로 불어오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있고 언덕 아래 오두막에서는 작은 사나이가 사립을 밀고 나와 징검다리를 건너다 말고 멈추어 선다 사나이는 한동안 물을 본다 사나이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어디로 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황혼이 내리는 무렵에 나무들이 있고 바람이 있고 오두막이 있고 사내가 있고 징검다리가 있고 흐르는 물이 있다. 그들의 뒤에는 황혼이 있다. 황혼은 아래로 내려오고 바람은 꼿꼿한 나무들에게 수평으로 다가온다. 오두막과 작은 사내는 서 있거나 움직이고 물은 흐른다. 우리는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어디엔가 무릎을 모으고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할 뿐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세미하게 말씀하시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오래도록 걸음을 멈춘다. 그럴 때 손결이 한 번 스치고 지나간 듯 삶에는 하나님의 은총의 빛이 내린다. 그 빛에 무엇을 더 보태겠는가. 아모스는 이 시의 작은 사내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호세아와 이사야와 요나 등과 같은 시대 사람이었다. 아모스라는 이름은 짐꾼이라는 뜻이다. 그 뜻은 아모스의 주요 메시지에 대한 이해의 열쇠를 제공한다. 아모스의 예언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의 죄에 대해 주께 받아 짊어져야 할 큰 짐과 같았다. 확실히 아모스는 그의 백성의 죄 때문에 주의 말씀의 짐을 짊어지고 어디로 라고 묻지 않고 묵묵히 나르는 하나님의 짐꾼이었다. 2024-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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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아모스Am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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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요엘Joel
- 나무와 열매 요엘Joel의 이름은 '주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이다. 선지자 요엘은 가뭄과 메뚜기 재앙으로 살기 어려운 시절의 유다에서 활동했다. 요엘은 오순절의 선지자로 불리기도 한다. 요엘서 2장 28절에서 32절까지 기록된 유명한 예언을 사도 베드로가 사도행전 2장 16절에서 21절까지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엘의 예언의 목적은 주의 날을 준비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런 시가 있다. 봄 _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봄은 입안에 쑥 냄새가 도는 계절이다. 연못가 버들가지도 눈을 뜬다. 볕은 보송보송하다. 옷은 가볍고 걸음은 경쾌하다. 자연에게만 봄이 다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마음에도 그것은 돌아온다. 넉넉하고 화창하면 모두 봄이다. 그러므로 봄은 우리의 일상에서 제일로 선호하는 비유의 언어다. 요엘 선지자는 아주 감정표현이 능숙한 선지자였다. 그는 비유가 풍부하고 묘사가 생생했다. 요엘서에는 잊기 어려운 아주 독특한 두 사건이 비유로 묘사되고 있다. 한 사건은 선지자 당시의 유다를 휩쓴 메뚜기 재앙이었다. 다른 한 사건은 주의 날에 대한 것이다. 주의 날이 메뚜기 재앙의 비유 속에 나타난다. 그것은 현재의 재앙과 온 세상에 내릴 미래의 심판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메뚜기 떼의 묘사는 미래의 하나님의 군대를 나타내는 비유이기도 하다. 봄이라는 시의 맛은 봄을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으로 빗댄 데 있다. 마찬가지로 겨울 같은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는 항상 봄 같은 소망의 약속을 담고 있다. 사실 모든 날이 주의 날이다. 인간과 나라들에 어떤 재난이 임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항상 조절하신다. 그러므로 이러한 재난들은 장차 임할 더 큰 심판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그렇듯 오늘날의 성도들도 어려운 세상 속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오는 봄같은 하나님의 소망의 약속을 교회와 거리와 사람 사는 동네에서 기다리자. 그리하여 이 세상에 봄볕같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득할 때까지 소망하자. 2024-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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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요엘Jo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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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호세아Hosea
- 금송아지 우상 호세아Hosea의 이름은 구원이라는 뜻이다. 호세아는 죽음을 맞이한 이스라엘의 선지자라고 불린다. 당시에 이스라엘이 외적으로는 번성하고 있었지만 내적으로는 부패하고 분명한 심판을 앞에 두고 있었다. 호세아는 비유의 대가이다. 호세아서에서 그의 많은 비유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시가 있다. 미술시간 _김종상 그림붓이 스쳐간 자리마다 숲이 일어서고 새들이 날고 곡식이 자라는 들판이 되고 내 손에 그려지는 그림의 세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아무도 모르는 어느 큰 분이 그렇게 그려서 만든 것이 아닐까? 색종이를 오려서 붙여 가면 집이 세워지고 새 길이 나고 젖소들이 풀을 뜯는 풀밭도 되고 색종이로 꾸며 세운 조그만 세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아무도 모르는 어느 큰 분이 그렇게 만들어서 세운 것이 아닐까 어린이는 천진한 눈을 깜빡인다. 붓이 스쳐간 자리마다 바람에 흔들리는 숲과 창공을 활강하는 새들과 곡식이 자라는 들판이 놀람과 즐거움으로 나타난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린다 하더라도 그림은 현실과는 다른 세계다. 색종이를 오려 붙이자 홀연히 집과 길과 들판이 나타난다. 그림의 세계는 현실의 반영이고 작은 세계는 하나님께서 창조한 우주의 축약이자 그 울림이다. 어린이는 그 사실을 본능으로 깨달은 것일까. 그림을 그리고 색종이를 오려 붙이며 몰입과 창조의 기쁨을 겪은 어린 마음이 물음을 던진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아무도 모르는 어느 큰 분이 그렇게 만들어서 세운 것이 아닐까. 그 상상 속에서 어린아이와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이 하나가 된다. 호세아의 예언은 영적 우상숭배의 실제적인 예를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호세아의 결혼에 대한 것이다. 호세아는 한 여인과 결혼했다. 그의 아내는 호세아에게 세 자녀를 낳아 준 뒤 남편을 버렸다. 호세아는 그녀를 노예 시장에서 다시 사야 했다. 이 행위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의 배신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비유한 것이었다. 호세아의 괴로운 체험이 자기 민족을 위한 설교가 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결혼했지만 마음이 남편 되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들에게 있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죄로 고통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회복시키실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과 짝하여 마음은 딴 데 가있으면서 여전히 하나님에게 신실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경고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주님께서 요한계시록 2장 4절과 5절에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다 너는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들을 행하라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2024-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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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호세아Hos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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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다니엘Daniel
- 다니엘과 사자굴 느부갓네살이 주전 605년 유다를 정복했을 때 수많은 유대인을 바빌론으로 강제 이송했다. 그 사람들 가운데 다니엘Daniel과 그의 친구들도 있었다. 그들은 그 당시 십대였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축복하셨다. 다니엘은 다른 세 왕조에서 네 명의 다른 통치자들을 섬기는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다니엘서를 읽으면 주님에게 신실하고 적의 땅에서 주님을 영화롭게 한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다니엘서는 나라의 일들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강조한다. 계속 이어지는 꿈과 환상들에서 하나님은 지상에 약속의 나라가 세워질 때까지 진행될 이방 나라의 역사를 다니엘에게 보여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니엘이 보지 못한 환상과 꿈도 해석할 수 있게 해주셨다. 이런 시가 있다. 연구자의 기도 _1963년 화학학회 회보 신이시여 제 이론이 검증될 때 신의 종이 거짓말을 했음이 드러나지 않도록 제 이론에 나오는 예측에 은총을 내려주소서 모든 위대한 과학적 업적이 노력만으로 얻어진 것은 아니다. 순전히 행운으로 이루어지기도 하고 단순하게 꿈으로 계시되기도 한다. 어떤 업적은 실제로는 완전한 착오인 것으로 판명되기도 했다. 이러한 오류는 당시의 과학적 무지 때문에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1963년 화학학회 회보에 실린 연구자의 기도라는 시에서 암시하듯이 과학자들의 명예는 그들의 고의적인 속임수의 결과이기도 했다. 다니엘은 예술가들의 착상이나 과학자들의 이론을 뛰어넘는 능력을 발휘했다. 느부갓네살이 그의 재위 2년에 꿈을 꾸고 마음이 괴로워 잠이 깼다. 왕이 마법사와 점성가와 갈대아 마술사를 소집하여 그 꿈을 해석하라 명했다. 그들이 달려와서 왕 앞에 섰다. 왕이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꿈을 꾸었다. 그런데 그 꿈이 알고 싶어 마음이 괴롭다. 갈대아 마술사들이 시리아어로 왕에게 말했다. 왕이시여 만수무강 하십시오. 그 꿈을 종들에게 알려주시면 우리가 해석하여 드리겠습니다. 그들은 꿈의 내용도 말하지 않고 해석하라는 느부갓네살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그것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다니엘이 해냈다.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은 왕이 꿈의 내용을 말하지 않았음에도 왕의 고민스러운 꿈을 알려주고 해석했다. 또 다니엘은 아무도 해석하지 못하는 벽에 쓰인 글을 해석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바빌론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멸망시킬 때 누가복음 21장 24절에서 말씀하는 이방인의 때가 시작됐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그의 영광의 나라를 세우려고 돌아오실 때까지 이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그의 완전한 계획을 이루실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다니엘의 삶에서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의 삶에서도 그의 주권을 행사하기를 원하신다. 우리도 자신의 마음속에서 다니엘처럼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기로 결단한다면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것이다. 다니엘은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정직한 믿음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섬겼기 때문이다. 2024-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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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다니엘Dani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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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에스겔Ezekiel
- 바벨론 포로들 에스겔Ezekiel은 주전 597년 바빌론으로 끌려간 포로들을 위해 사역을 했다. 반면 예레미야는 유다의 남은 사람들을 위해 사역을 했다. 이런 시가 있다. 상한 영혼을 위하여 _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라고 노래한 시를 읽으면 시인이 상한 영혼의 곁에 앉아 작은 목소리로 아픈 영혼들을 위로하는 것 같다. 이 시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라는 이사야 42장 3절의 말씀과 겹친다. 시인은 하나님을 모르는 절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이쁜 우매함인가라고 노래했다. 선지자 에스겔은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같이 오고 계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소망을 전했다. 주전 597년 느부갓네살이 유다를 두 번째 공격했다. 그때 에스겔은 10000명의 포로를 바빌론으로 강제 이송하는 무리에 섞여 끌려왔다. 예루살렘이 멸망한 5년 뒤 주전 592년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예레미야처럼 에스겔도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제사장이었다. 선지자로서 에스겔의 사명은 바빌론에서 포로로 잡혀 사는 유대인의 상한 영혼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을 강조했고 하나님의 명예를 존중했다. 유다 백성이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를 존중했다면 유대인이 그들의 적 앞에서 굴욕을 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심판이든 축복이든 하나님의 모든 일은 주의 거룩하심에서 비롯되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 행해진다. 2024-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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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에스겔Ezeki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