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5-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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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굳뉴스] 강진상 목사 초 한 대의 삶
    거룩한 태양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푸른 바닷속으로 뜨겁게. 바닷가에 선교사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흑발의 젊은이와 백발의 늙은이가. 늙은이는 생각하고 있었다. 언젠가 나도 저 은혜로 쉬게 되리라. 이렇게 편안히. 젊은이도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죽을 때도 저 영광의 광채가 내리기를. 이렇게 황홀하게. 로마 가톨릭교회의 사제이자 작가, 신학자 로마노 과르디니(Romano Guardini, 1885년 2월 17일 - 1968년 10월 1일)는 말했다. "삶과 나이에 따르면, 모든 하루하루는 단 한 번밖에 오지 않기에 다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소중함을 얻는다. 존중받지 못할 순간도 의미 없이 지나가는 순간도 없다. 순간의 존엄함을 아는 사람은 지금 여기의 삶을 온전히 누리려는 강렬한 긴장을 느낀다. 이런 긴장 없는 삶은 단조롭고 지루하게 다가온다. 때론 상실감과 후회 속에서 공허와 절망의 나락에 떨어질 위험도 있다." 또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사제이자 작가, 신학자 과르디니(Romano Guardini, 1885년 2월 17일 - 1968년 10월 1일)는 인생엔 여러 단계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 인생 여행은 유년, 청년, 성년, 중년, 노년, 말년의 단계를 밟아 죽음에 이른다. 시기마다 반드시 해결할 과제가 있고 이룩할 가치가 있으며 넘어야 할 위기가 있다. 하나의 시기를 완전히 살아내지 못하면, 즉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고 가치를 성취하며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좋은 삶은 불가능하다. 과거가 현재의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물러남을 받아들이고 평생 이룩한 가치를 지켜낼 때, 노년의 삶은 완성을 향해 달려간다. 진정한 것과 덧없는 것, 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분별하는 지혜 속에서 통찰, 용기, 평정, 자존 같은 고상한 가치를 실현하는 현자의 삶을 살 수 있다. 좋은 삶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고통을 견디고 위기를 건너며 가치를 이룩하지 않으면 누구도 삶의 달콤함, 그 눈부신 기쁨을 알 수 없다." 1968년 10월 1일 로마노 과르디니는 83세로 지인들 기도 속에 영원히 잠들었다. 다음날 지인들이 모여 그의 부고 문구에 어떤 호칭을 사용할지 논의했다. 그는 가톨릭 사제, 대학교수, 신학자, 종교철학자, 교육자, 청년운동 지도자, 전례개혁자였다. 하지만 그 어느 호칭도 그의 활동과 인물됨을 모두 담아낼 수 없었다. 오랜 논의 끝에 지인들은 '로마노 과르디니-주님의 종(Diener des Herrn)'으로 결정했다. 한평생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받들어 모시며 살았던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호칭이었다. 2023년 3월 15일 오후 4시 무렵 양산의 평산교회 카페 비 마이 프렌드(Be My Friend 나의 친구가 되어라)에 앉아 있었다. 쾌적한 카페의 창가 햇살을 받으며 핫초코를 홀짝였다. 아파트 단지 초입 대로변에 세워진 평산교회는 4면이 각기 다른 모습을 내는 독특한 구조로 건축됐다. 정형화되고 고착화된 교회 이미지를 탈피하고 주민들에게 거부감 없는 교회로 다가서기 위한 세심한 관심이 없다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평산교회는 교인들에게 필요한 시설은 물론 지역사회를 위한 배려도 있다. 그것은 교인과 지역 이웃을 향한 목회자의 애정과 사랑이 교회건축을 통해 나타난 것이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누구든 언제나 교회시설을 이용하거나 지나갈 수 있도록 사방이 열려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교회 바로 뒤편 아파트단지 주민의 주차장 이용과 교회시설 이용 편의를 돕기 위해 교회 마당과 아파트를 잇는 계단도 별도로 설치했다. 교회 후문을 통해 1층 교회 건물 내부로 들어오면 바로 오른쪽에 황토찜질방이 있다. 성인 10여 명이 동시에 들어갈 수 있는 황토찜질방은 여느 찜질방 못지않은 좋은 황토와 탈의실 등으로 꾸며져 있다. 주민들이 휴식하며 교제할 수 있는 카페도 마련돼 있다. 일천 명이 예배드릴 수 있는 규모로 지어진 본당은 극장식 의자가 설치되어 있다. 이는 교인들에게 편안한 예배와 기도 목적 외에도 평일에는 지역주민을 위해 결혼식장과 발표회 등의 공간으로 제공하기 위해서다. 3층 유아실은 아이들이 편히 사용할 수 있는 어린이 전용 화장실과 모유 수유를 위한 별도의 수유실도 마련했다. 4층에는 헬스장도 있다. 이 역시 지역주민을 위한 체력단련장으로 무상 제공되고 있다. 강진상 목사는 교회 설립 당시 평산교회의 존재 목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지역을 품는 교회 사명을 위해 문화와 복지와 같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도입해 지역을 섬기는 노력 이상으로 선교와 전도를 위한 교회의 본질을 놓치지 않겠습니다." 2023년 3월 15일 오후 5시 강진상 목사와의 대담 시간이 돼 카페를 나와 교회에 들어서니 당회장실로 안내를 받았다. 평산교회는 3월 18일 토요일 교회 장로 은퇴식과 직분자 임직식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은퇴식에 강진상 목사도 포함되어 있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의 은퇴는 아직 3년이나 더 남아 있었다. 강진상 목사의 은퇴가 아니라 목회에 대한 대담을 나누게 되었다. 부산과 울산 두 개의 광역시를 사이에 둔 경남 양산시에 지역 최대 규모의 교회가 있었다. - "와서 보니 목사님 큰 역사를 이루셨네요." 강진상 목사 - "아니 뭘." - "장로 은퇴식과 직분자 임직식을 앞두고 있는데 목사님 은퇴식으로 잘못 알고 미리 찾아뵙게 됐습니다. 지금 평산교회에 몇 년 되신 겁니까." 강진상 목사 - "올해 35년 됐습니다." - "아. 그러시구나. 그럼 평산교회만 35년 되신 거죠." 강진상 목사 - "네 그렇습니다. 이 교회 개척을 35년 전 1988년에 했습니다." 강진상 목사는 겸손한 웃음을 지었다. - "총신 몇 회세요." 강진상 목사 - "저는 총신을 좀 늦게 공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86회입니다. 제 또래 목사들은 76회죠. 저는 10년 늦게 시작한 거죠." 사모님이 차를 내오셨다. - "어떻게 평산에 평산교회를 시작하시게 됐습니까." 강진상 목사 - "제가 본래 여기 있기 전에 월평이라는 곳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버스로 두 정거장 떨어진 곳인데 교회가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저는 부산의 전포중앙교회 오세광 목사님 그분이 담임으로 계실 때 제가 전도사로 있었습니다. 오 목사님이 저희 집에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강 전도사 선교에 대한 열정도 있는데 이 지역에 교회가 없어서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그분이 그런 도전적인 말씀을 하셔서 계기가 된 것입니다. 5년 뒤 주인이 집을 내달라고 하고 그린벨트이고 수원지 보호지역이라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어 이쪽으로 오게 된 겁니다." 그는 1988년 1월 전도사 시절, 양산군 정관면 월평리 280번지 허름한 시골집 셋방에서 월평중앙교회라는 이름의 교회를 개척했다. 1992년 2월 24일 현재의 양산시 평산동으로 교회 건물을 신축·이전하면서 이름을 평산교회로 바꿨다. 부산시 전포동 소재 전포중앙교회의 오세광 목사의 권면과 후원으로 시작됐다. 평산교회는 개척 초창기부터 제자훈련을 실시하며 알찬 성장을 거듭했다. 또한 교인 구성원 70% 이상이 초신자들의 회심으로 이뤄져 있을 정도로 건강한 교회상을 세웠다. 강진상 목사의 목회관은 예배하는 공동체, 선교하는 공동체, 교육하는 공동체, 봉사하는 공동체이다. 그래서 지난 2013년 9월 1일, 한국일보가 주최한 ‘2013 대한민국 자랑스런 한국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양산시 인재육성장학재단에 장학금 기부, 지역봉사 활동 등 지역공동체를 실천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으로,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주님의 종으로서의 헌신적인 목회를 일관했다. 강진상 목사는 기도로 교회를 세우고 한평생 나눔과 섬김을 실천했다. - "신학을 늦게 하셨다고 했는데 그 전에 다른 일을 하셨습니까." 강진상 목사 - "돌아가셨지만, 아버님이 강희성 목사님이셨고 저는 좋은 평신도 지도자가 되고 싶어서 부산의 모 교회 안수집사로 있다가 신학을 하게 됐습니다. (아들은 군목 중령으로 연무대교회 담임목사이고 딸은 결혼해 미국 워싱턴장로교회 출석하고 있다.) 늦게 교회를 개척하면서 제자훈련을 했습니다. 평신도를 훈련해 사역을 같이 했습니다. 지역을 섬기는 사역을 많이 해왔습니다. 노인대학, 지역아동센터, 장애아 사역, 교회 앞 카페도 기아대책(飢餓對策, Food for the Hungry, FH), 공정무역(개발도상국의 농가에게 덤핑가격이 아닌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여 해당 국가의 농민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사회 운동) 카페 3호점 ‘비마이프렌드’(Be My Friend 나의 친구가 되어라)입니다. 선교사들 파송해서 커피콩을 거두어 오면 우리가 공정무역 패어 트레이드(fair trade)라고 해서 팔아서 남는 이익금을 선교하는 목적으로 카페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역 행사들이 있으면 저희 교회에서 후원을 많이 합니다. 양산이 불교가 강한 지역이라 불교권 파송 선교사라는 마음가짐으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목회밖에 모르고 목회만 계속 해왔습니다. 그런데 노회장을 하고 교회 연륜이 있다 보니까 노회도 섬겨야 되고 총회도 섬기게 됐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총회도 가게 되고 총대가 아니라도 영남지역 총신 운영이사로 갔을 때입니다. 우리 노회에 유명한 분들 많이 계시잖아요. 정연철 목사님, 배광식 목사님, 이성택 목사님, 다 총회 일하신 분들 가서 총회 일 하시도록 보내드리고 우리는 노회 섬기고 그랬습니다." 강진상 목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결정적인 것은 총신 운영이사장을 하게 되면서 총회를 섬기게 된 것이었습니다. 양산이 불교가 강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교회에 대해 지역 정서도 부정적이라서 교회나 목사의 존재는 뭐랄까 무시하고 하찮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 마음속에 의분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뭔가 불교와 다른 차별화 스님과 목사가 뭐가 다른가. 교회 다니는 권사님과 장로님하고 절에 다니는 보살이 뭐가 다른가. 좀 차별화를 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지만 전통적인 교회에서 하기 힘든 지역봉사를 참 많이 해왔죠. 교회나 목회자에 대해서 인식을 새롭게 할 일을 많이 했습니다." 1988년 허름한 시골집 셋방에서 월평중앙교회라는 이름을 달고 기도로 교회를 시작한 그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역시 불교 영향력이 큰 지역이라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이미 타 교단에서 몇 번이나 교회를 세웠다가 철수를 하는 어려움을 겪었던 지역이라 지역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강진상 목사는 25년 전 불모지와 같던 경남 양산 월평리에 내려와 부부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은 마을 주민이 되는 것이었다. 사모님은 남편 신대원 학비를 벌기 위해 할머니들과 밤늦게까지 채소를 다듬으며 농촌 지역의 주민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고 이 마을에 살고 있었던 강진상 목사는 어른들을 만나기에 바쁜 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래서인지 마을 주민이 된 부부에게 다행히 마을 어르신들은 안 나와도 아이들이 교회 다니는 것은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교육하는 공동체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92년 선교원을 시작으로 처음 사역이 어린이 전도였다. 당시 월평초등학교 전교생 80명 중 72명이 교회에 나올 정도였다. 그때 주일학교 아이들이 지금의 젊은 세대를 이루어 청년부를 이끌었다고 한다. 잠시 알프스에서 자라는 13가지 허브 추출물이 들어있다는 맛이 깔끔한 리콜라 허브차를 나누었다. - "실례지만 교세가 얼마나 되십니까." 강진상 목사 - "코로나로 좀 침체됐지만 장년은 7백 명 정도이고 주일학교는 3백 명 정도입니다. 교세가 천 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많이 회복은 됐지만 저희 교인 70프로는 전도돼서 오신 분들입니다. 수평 이동이라기보다는 대부분 전도해서 오신 분들이 많습니다." - "처음 보고 규모에 깜짝 놀랐는데 여기에 터를 잡으신 건 언제입니까." 강진상 목사 - "네 번 옮겨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2005년 본당을 짓고 입당을 했죠. 땅은 주차장까지 해서 2천 평입니다. 2013년에 비전센터를 지었습니다." 2005년 본당을 지은 뒤 2013년 평산교회 비전센터의 완공은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 활동에 더욱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120평을 지역사회에 기부해 2~3층에서 강의실과 지역사회를 위한 결혼식장, 주민자치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 - "총회를 섬기신 일을 소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강진상 목사 - "총회를 위한 일이라면 총신 운영이사회를 10년 넘게 섬겼습니다. 다 아시겠지만 운영이사회 이사 노회 1년 분담금이 그 당시 3백만 원이었습니다. 그걸 낼만한 교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우리 노회에서 지원해주지 않거든요. 자비 부담해야 되는데 선배 목사님들이 저한테 총신 운영이사회 좀 섬기라고 등 떠미는 바람에 떠밀려 하게 된 겁니다. 이사로 섬기다 이사장도 맡게 됐습니다. 요즘 총회를 위해 하는 일은 정치부 부장입니다. 총회다음세대운동본부 서기를 맡고 있습니다. 그리고 올해 처음 생겼지만 세계개혁주의부흥협회 위원장도 맡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개혁주의 신앙을 갖고 있는 교단과 교류하고 세계교류협회가 있지만 친선관계라면 우리 교단이 갖고 있는 개혁주의 신학을 지속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정보를 주거나 함께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기구입니다." - "우리 총회를 위해서 정말 매우 중요한 부분들인데 총신운영이사장이라든지 중요한 직책을 잘 감당해주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강진상 목사 - "미력하지만 그래도 호불호가 있지만 권순웅 총회장님 이번 3월 18일 토요일 오셔서 설교하십니다. 그분은 총신(김영우가 총회와 총신을 분탕질하던 2010년대) 문제 때문에 ('하나님 말씀이 삶에서 실현될 때 개혁이 되는 것이며 부흥이 되는 것'이라 외친 제102회 총회) 서기였고 제가 총신운영이사회 이사장이라 그때부터 같이 비전과 꿈을 갖고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총회장 되시면서 제가 정치부서기를 맡게 됐죠." - "권순웅 목사님 그 당시 참 열정적으로 뛰어다니셨죠." 강진상 목사 - "돌이켜보면 민감한 부분이지만 그 당시 개인 돈을 써가면서 TF팀을 30회 이상 모였습니다. 저는 그 당시 SRT 고속열차 한 달 요금이 2백만 원 정도였습니다. 일주일에 이틀씩 울산역에 주차하고 서울 올라가서 일보고 내려오고 했습니다. 맡은 일에는 책임을 다해야 하는 성격이라서 그랬는데 전계헌 총회장이 항상 외부에 갔다오면 하신 이야기가 교단 쪼개진다고 걱정할 정도로 사실 위기였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총신이 그대로 가면 자칫하면 교단 쪼개질 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총신을 정말 사랑하셨습니다." - "총신이 사유화되는 거였습니다." 강진상 목사 - "결론적으로 그 당시 (김영우를 상대로 한) 총신 문제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했습니다. 절대 안 된다고 했죠. 여러 가지 과정이 있었지만 총신이 그대로 있고 총회가 갈라지지 않은 것은 하나님 은혜였습니다." 사실 당시 김영우 목사가 총회 부총회장 출마를 안 했거나 아니면 총장 사표라도 냈다면 총신 사유화 되는 거였다. 난공불락의 꾀돌이가 박무용 목사에게 건넨 제 꾀에 빠져 법정 구속되는 바람에 무너지고 말았다. 강진상 목사 - "역사가 훗날 평가하겠지만 참고로 말씀드리면 나라를 위해 전장에 나가 이기고 돌아온 장군을 역적으로 모는 경우가 있습니다. 화해한다고 남들은 다 풀어 영웅으로 만들어 놓고... 사실 잘 아시겠지만 총신에 임시 이사가 들어오는 건 맞지만 정관이 살아 있으면 우리 교단의 목사 장로로 이사를 세울 수밖에 없어요. 사분위(사립학교에서 구성원 간 분쟁 등으로 인해 학교법인의 기능이 마비되는 경우 교육부에서 임시이사를 파견한 후 정상화하여 정이사 체제로 환원하는데 그 과정에서 임시이사의 선임과 해임 등을 심의하는 정부 기관)도 그 정관을 넘어설 수 없거든요. 그런데 우리 앞에 있었던 구 이사들(김영우 지지 이사)이 김영우와 정관을 개정하면서 교단의 목사 장로 조항을 개혁주의 신학을 가진 자로 바꾸자 여자 이사가 들어오게 되고 아무나 이사가 될 수 있게 됐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문구가 이사 선정 기준이 되니 너무 모호하잖아요. 그런 것들이 (우리의 정체성을 부정하게 되는) 문호를 열어버리게 된 겁니다. 모든 책임은 운영이사회가 지게 됐죠. 사실 제 입장에서 너무 억울하죠. 그것은 운영이사회에서 만든 것이 아니고 정관을 고쳤기 때문이죠. 그래서 사분위가 그 정관대로 이사회를 구성하게 된 거죠." - "사실 김영우 목사가 주도한 거죠. 어쨌든 김영우 총장 체제가 무너지고 이렇게 된 것은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된 거죠." 강진상 목사 - "무엇보다도 당시 학내 소요로 신학생들이 양분되어 있었잖아요. 김영우 반대하고 수업 거부하며 데모한 학생들 또 수업받는 학생들. 그래서 그때 제가 수원 라비돌에서 칼빈, 대신, 광신 학생들까지 모아놓고 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엄마 아빠가 사이좋게 살다가 헤어졌다. 큰아들은 아빠 따라가고 작은아들은 엄마 따라갔다. 그건 자식들 책임이 아니다. 총신 사태도 마찬가지다. 김영우 목사를 반대하는 학생 측이 있고 찬성하는 측도 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훗날 졸업하면 같은 기수 동창생인데 친일파, 반일파처럼 서로 상처를 가지게 될 것 같더군요. 그래서 전부 라비돌에 모아놓고 후원도 받고 자체 경비로 해결하면서 먹이고 재우면서 화합을 촉구했습니다. 학생들이 정치적인 희생양이 되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2년 동안 고시부에 들어가서 그 학생들 다 강도사 고시 보고 목사 고시 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왜냐하면 총신에 가서 학생들 만나면 총회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총회 믿고 싸우다 희생 당하면 책임지겠느냐는 겁니다. 제가 데모를 충동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총회를 믿으라고 말했습니다. 총회가 책임질 것이다. 그 말에 대한 책임을 내가 져야겠더라고요. 그래서 고시부에 지원해 들어가서 고시부에서도 안 된다는 학생들을 실력이 아나라면 정치로는 불이익을 줘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변호했습니다. 영웅 대접할 필요도 없지만 역적 대접할 필요도 없다고 했습니다. 학생들에게도 말했습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먼 훗날 졸업하고 단독 목회를 하게 되면 기수가 동기라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느끼게 될 것이다. 여기서부터 서로 반대하고 상처받고 나가면 치유 받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당시 111회, 112회 목사 된 사람들 가끔 만나요. 만나면 그들이 먼저 인사하고 그때 고마웠습니다, 합니다. 총회장은 1년이고 총장은 계속 있으니 학생들은 총회 믿을 수 없다 하는 겁니다. 그런 말을 입버릇처럼 했죠." 목사 강진상은 평산교회와 양산 주민을 위한 주님의 종인 것처럼 주님의 종이 될 총신 졸업생들을 위해 헌신한 주님의 종도 됐었다. 평산교회는 지난 2021년 4월 18일 캄보디아 장로교신학교 씨엠립 분원 건축을 위해 2천만 원의 헌금을 전달했다. 신학생들의 안정적인 교육을 위해 장학금 5백만 원도 별도로 지원했다. 캄보디아 장로교신학교(총장 김재호 목사)는 144개 교회, 292개 기도처, 7899명의 청장년 성도, 1만8436명의 어린이로 구성된 캄보디아장로교 독노회가 운영하는 신학교다. 캄보디아 북부의 중추 도시인 씨엠립의 목회자 양성과 훈련을 위해 장로교신학교 지난 2017년 9월 27일에 분원을 개교했다. 총회군선교회는 제23차 정기총회를 2022년 5월 26일 서울 서초동 사랑의교회(오정현 목사)에서 갖고, 신임회장에 강진상 목사를 선출하는 등 새 임원진을 조직했다. 강진상 신임회장을 비롯한 총회군선교회 회원들을 대한민국 전 부대에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사명 아래 군선교에 더욱 진력하기로 다짐했다. 2022년 10월 25일 세계개혁주의부흥협의회가 첫 번째 회의를 총회회관에서 열고 사업 방향을 논의했다. 임원 조직으로는 위원장에 강진상 목사가 세워졌다. 회의에 참석한 제107회 총회장 권순웅 목사는 말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교단은 가장 큰 장로교회로 성장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세계교회와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오순절이 은사 중심이라면 우리 개혁주의는 말씀과 기도, 전도 중심 운동으로 전 세계를 섬길 수 있습니다. 이 일의 적임자가 바로 위원장 강진상 목사님이십니다.” 제자훈련에 있어 양육과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래서 평산교회는 교육공동체로서 행복아카데미와 제자대학 그리고 주일학교가 활성화 되어 있다. 확신하는 삶, 회복의 삶, 행복한 삶, 축복의 삶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평산노인대학은 지역내에서 유명세를 탈 만큼 많은 노인들이 참여하고 있다. 사회적 통합 증진을 위한 소외계층 평생교육 프로그램으로 교육인적자원부와 함께 저소득자, 저학력자, 고령자, 장애자 등 취약계층에 대한 자활기회 부여와 삶의 질 향상을 도모하고자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농촌의 특성상 노인들이 많다는 점에서 평산노인대학은 다른 지역에서도 벤치마킹하고자 할 만큼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평생학습도시 만들기를 희망하는 기초자치단체와 지역교육청과 협조, 그동안의 노하우를 컨설팅해주기도 하고 있으며 우수한 평생학습 프로그램을 발굴, 지원하는 일로 이를 타 지역에도 보급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평산교회의 또 다른 주력 사역으로는 봉사하는 공동체로,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활동이다. 바로 지역 섬김을 실천하는 것으로 5년 전부터 지역아동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지역 내 돌봄이 필요한 아동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교육시켜 건강하게 자라도록 돕기 위한 일로 비전센터를 세우면서 29명을 50명까지 확대했다. 토요일 전면 휴무제가 시행되면서 사각지대에 놓인 결손가정 아이들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 토요창의학교도 운영 중이다. 여기에다 2010년부터는 행복한 나눔가게도 운영, 웅산 지역에 이어 두 번째로 탄생한 평산점을 오픈하였다. 기증받은 물품들을 지역민들에게 싸게 공급하고 그 수익금으로 해외 굶주린 이웃과 지역사회를 돕는 기아대책에 지원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목회자 자녀로 가난하지만 영성과 섬김의 정신을 배운 강진성 목사는 말한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만남에서부터 시작되며 가장 본질적인 만남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강진상 목사는 2025년 1월18일 양산 복음화를 위해 바친 38년의 목회 사역을 마무리하고 평산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며 말했다. “제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광야의 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샘물을 나게 하신 것처럼 그저 불도저처럼 앞만 보고 왔습니다. 주민들은 나를 가리켜서 인간 승리라고 하지만 하나님이 승리하신 겁니다. 무모할 수 있던 교회 건축도 믿음으로 따라준 직분자와 성도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개입이었고 섭리였습니다. 이제 그 뒤를 이어 갈 담임목사와 성도들 앞의 또 다른 시대적 사명들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로 훌륭하게 열매를 맺길 바랍니다.” 살면서 좋은 부모를 만나는 것도, 훌륭한 배우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도, 사회적으로 훌륭한 스승을 만나는 것도 모두 중요한 부분이지만, 인생의 길을 안내받고 또한 영혼구원을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인생의 방황은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끝이 나고 신앙의 방황은 평신교회를 만남으로 끝을 맺게 된다는 주님의 종 강진상 목사. 시인 소강석 목사가 사랑하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른 윤동주 시인의 시 '초 한 대'가 주님의 종 강진상 목사의 삶을 기리는 것 같다. 내 방에 풍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재단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명인 心志까지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버린다. 그리고도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가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풍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1934.12.24. 성경은 말씀한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신고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말씀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으로 종에게 허락하셨사오니 이제 청컨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 삼하 7:27-29 2023-04-04 수정 2025-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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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08
  • [더굳뉴스] 김문기 장로 '신기루' 인생 '촛불' 사명
    전국장로회 회장 강의창 장로 종소리같은 복음송 김문기 장로 전국 장로와 신자의 복음 가수라고 말해 소강석 목사의 복음과 목회생태계 사절(使節) 김문기 장로 찬양 앨범 2집 ‘신기루 인생’ 3집 '촛불' 발매 김문기 장로 2018년 한 해만 97회의 찬양간증 간증 시간 모자랄 정도 하나님 사랑 넘치고 또 넘쳐 찬양 신기루 인생 서용봉 작사/장욱조 작곡 고해같은 힘든 인생 될 줄 알고 뛰었건만그럴수록 거품처럼 부서지는 내 인생아주님 없는 인생길 신기루가 아니던가광야같은 세상에서 예수님만 의지하니잡초같은 내 인생에 이제 꽃이 피어나네 의지할 이 주님이라 두 손 들고 주께 왔네무거운 짐 내려놓고 예수님만 의지하리주님 없는 인생길 신기루가 아니던가광야같은 세상에서 예수님만 의지하니잡초같은 내 인생에 이제 꽃이 피어나네 소망의 길 승리의 길 하나님이 같이하네길과 진리 생명이신 우리 주님 인도하네주님 없는 인생길 신기루가 아니던가광야같은 세상에서 예수님만 의지하니잡초같은 내 인생에 이제 꽃이 피어나네 목사의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집안 사정으로 목사의 길을 포기한 김문기 장로는 어느 날 교회의 종탑을 보고 소리를 내는 저 종처럼 하나님의 쓰임을 받게 되리라 깨달았다고 한다. 사라졌지만 잊지 못하는 것. 갔지만 남는 것. 그것은 사랑이고 은혜다, 그리고 신기루 인생의 기억이고 세월이다. 꽃 필 때는 피는 꽃처럼 오고 잎 질 때는 지는 잎처럼 가는 그 사랑과 은혜는 오래된 미래다. 미래의 과거다. 나뭇잎이 떨어져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사라진다 해도 여름이어서 빛났고 가을이어서 서늘했다. 이 서늘한 가슴에 살아남는 것은 세월보다 신기루 인생의 기억이다. 종탑 아래 그 교회 유리창 빛에 어른거리던 그 은혜의 밤을 잊지 못한다. 그러나 그 은혜의 순간은 가고 믿음만 남는 '신기루' 인생 그리고 '촛불' 사명. 세계적인 교회로 성장한 새에덴교회(소강석 목사) 대외협력국장으로 교단과 교계, 복음과 목회생태계 사도(使徒) 소강석 목사 사역을 받드는 복음송 사역자 김문기 장로의 발길은 언제나 그의 노래가 함께한다. 교회의 종소리처럼 울리는 그의 노래를 전국장로회 회장 강의창 장로는 전국 장로와 신자를 일으키는 복음 가수라고 말한다. 소강석 목사의 복음과 목회생태계를 위한 열정과 헌신을 전하는 사절(使節) 김문기 장로는 믿음의 노래를 겸하여 부르다 2017년 2집 ‘신기루 인생’ 2019년 3집 '촛불'을 냈다. 김문기 장로는 말했다. 특히 이번 앨범의 ‘신기루 인생’은 유명 가수 겸 작곡가인 장욱조 목사가 작곡자이면서 제작은 물론 김문기 장로의 음악 지도까지 맡아 했다. ‘저 산마루 깊은 밤 산새들도 잠들고 우뚝 선 고목이 달빛 아래 외롭네 옛사람 간 곳 없다 올리도 없지마는 만날 날 기다리며 오늘이 또 간다...’ 1980년 크게 히트했던 가요 ‘고목나무’. 40/50대라면 지금도 몇 소절쯤은 읊조릴 수 있는 노래다. 이 노래의 작사 작곡자이자 가수였던 장욱조 씨(일산 한소망교회 선교목사)는 세상에 젖어 살던 유명 가수 시절 보다 교도소 병원 군부대 교회 전도 집회를 매월 20차례 이상 다니며 바쁘게 살고 있다. 장욱조 목사는 한창 잘나가던 가수로 가요순위 프로그램에서 17주 동안이나 1위를 차지하고 ‘상처’(조용필) ‘아니야’(조경수) ‘기다리게 해놓고’(방주연) ‘내 젊음의 빈 노트’(유미리) 등 히트곡의 작사 작곡자로 명성을 떨칠 때보다 지금 목사로 사는 삶이 더 행복하다고 고백한다. 장 목사가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은 1986년 3월 30일이다. 그의 가족들은 이날을 집안 기념일로 지키고 있다. 먼저 믿은 아내가 교회에 가자고 졸라도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마다했다가 그 날 하는 수 없이 교회를 나갔다. 그런데 인기도 예전 같지 않고 운영하던 업소도 어려워져 절망의 벼랑 끝을 헤매고 있었던 때라 교회의 따스한 분위기가 왠지 맘에 들었다. 장 목사는 그때를 그렇게 회상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완전히 항복할 때 까지 기다려주시더군요.” 1년이 지난 어느 날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심령을 갈라놓았다. “하루는 연예인 선교단을 따라 찬양집회를 갔는데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란 찬양을 부르면서 마음에 이상한 감정이 치솟아 올랐습니다. 그 전부터 알던 찬양이었는데 그 날따라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 알 수가 없더라구요.” 그때부터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믿음이란 자기 목숨까지 하나님께 내어놓는 것이란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께 죄인이란 사실을 고백하자 마음에 뜨거운 감동이 일었다. 인기가수로 무대에 서서 환호를 받을 때도 맛볼 수 없었던 감동이었다. 그 감동이 복음성가로 터져 나와 ‘할 수 있다 하신 주’ ‘주님 나의 동산’ ‘하늘나라 여는 문’ ‘전하세’ 등 100여 곡을 지었다. 전국 교회와 신자의 복음가수 김문기 장로의 2집 앨범은 장욱조 목사의 신곡 ‘신기루 인생’ 외에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를 구원하신 아버지’ 등 12곡이 담겼다. 김문기 장로의 노래 열정에 날개를 달아준 이가 장욱조 목사다. 우연히 간증집회에서 만난 장 목사와 의기투합해 1집 앨범에 이어 2집 앨범까지 만들게 됐다. 신곡 ‘신기루 인생’도 장욱조 목사의 작품이다. 김문기 장로는 이 찬양이 자신의 인생을 말해주는 것 같아 특히 애정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 노래를 처음 들은 나도 그랬다. 그래서 취재를 하게 된 전국 장로와 신자의 복음 가수 김문기 장로는 전라도 억양으로 구수하게 말했다. “예전에는 주님을 떠나 광야의 잡초처럼 살았지만 주님을 만나고 난 뒤 내 인생에 꽃이 핀다는 가사입니다. 그 가사가 저의 삶을 그대로 투영한 것 같아 애착이 갑니다. 원래는 작사가가 부르려던 곡이었어요. 그런데 그분에게는 잘 맞지 않아 하나님의 은혜로 저한테 기회가 왔습니다. 부르면서 저도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곡에는 원 주인이 있다더니 저에게 딱 맞는 맞춤 곡이였죠. 작곡자 장욱조 목사의 배려에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낍니다. 특별히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소강석 담임목사님의 사랑은 더 말할 수가 없죠.” 신기루(蜃氣樓)는 바다 위나 사막에서 빛이 밀도가 다른 공기층을 통과하면서 굴절하여 생기는 현상을 말한다. 그 제목의 노래 ‘신기루 인생’이 우리 인생을 되돌아보게 한다. ‘고해같은 힘든 인생 될 줄 알고 뛰었건만 그럴수록 거품처럼 부서지는 내 인생아 주님 없는 인생길 신기루가 아니던가 광야같은 세상에서 예수님만 의지하니 잡초같은 내 인생에 이제 꽃이 피어나네’ 장맛비가 산골을 후비는 2016년 7월 4일 오후 3시 정선군 고한읍 하이원리조트 컨벤션홀에서 제38회 전국장로회연합회(회장 김성태) 하기수련회가 3000여명이 모여 개회됐다. 소강석 목사가 은혜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그 집회에서 김문기 장로가 “주여 이 죄인이” 라는 복음의 노래를 절절하게 열창해 ‘존경받는 장로가 되자’는 기치 아래 모인 장로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 주었다. 세상에서 방황할 때 나 주님을 몰랐네내 맘대로 고집하며 온갖 죄를 저질렀네예수여 이 죄인도 용서 받을 수 있나요벌레만도 못한 내가 용서 받을 수 있나요 ... 내 모든 죄 무거운 짐 이젠 모두 다 벗었네우리 주님 예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오내 주여 이 죄인이 무한 감사드립니다나의 몸과 영혼까지 주를 위해 바칩니다 소망의 길 승리의 길 하나님이 같이하네길과 진리 생명이신 우리 주님 인도하네주님 없는 인생길 신기루가 아니던가광야같은 세상에서 예수님만 의지하니잡초같은 내 인생에 이제 꽃이 피어나네 김문기 장로는 2집 '신기루 인생'에 이어 2019년 3집 '촛불'을 발매했다. 2017년 2집을 1만장 제작한 데 이어 3집으로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린다는 포부다. 3집 앨범은 신곡 2곡을 포함해 총 15곡을 수록했다. 그 중 타이틀 곡 '촛불'은 대한민국 문단의 공인받은 문학상 수상 시인이자 대한민국 대표적 설교자와 목회자인 소강석 목사가 작사·작곡한 곡이다. 교단의 대표적 복음송 가수 김문기 장로는 말했다. “이 찬양에 ‘사랑할수록 부족하고 드릴수록 목마르기에…’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소강석 목사님이 목회자로서 하나님과의 관계 사이에 느끼는 감정을 표현한 것인데, 나도 부르면서 그 감동과 기쁨에 넘쳐 눈물을 흘렸습니다. 젊었을 때 가수가 되고 싶었지만 이루지 못했던 꿈을 70대의 나이에 이뤘어요. 앨범을 내고, 저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서 간증하며 찬양을 부르는 지금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제 목소리로 복음의 은혜를 전파할 수 있다는 것이 빛이신 하나님의 은혜이고 약하고 부족한 제게 촛불 같으신 소강석 목사님의 후원 덕이죠...” 성경은 말씀한다.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찌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146:1-5 2025-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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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30
  • [더굳뉴스] 윤석열 변호인 조대현 신앙고백
    하나님께서 내 모든 명예를 내려놓으라고 (이런 일을) 하게 하시나봅니다 로마의 황제 첫 번째 칭호 로마의 제일 시민 전 헌법재판관 조대현 장로 신앙을 따른 대한민국 제일 법관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 대리인단으로 조대현(74) 전 헌법재판관 합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법연수원 7기 동기 친목 모임인 ‘8인회’의 일원 조 전 재판관은 서울민사지법 판사로 임관해 2004년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끝으로 법원을 떠난 그해 노 전 대통령 탄핵 심판에서 대통령 측 변호인을 맡아 탄핵 기각을 이끌어 내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 두 번째 공개 변론이 2025년 1월 16일 오후 2시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렸다. 윤 대통령의 불출석으로 4분 만에 끝난 첫 변론과 달리, 이날 야당이 주도하는 국회 탄핵소추단과 윤 대통령 측 대리인단은 비상계엄 선포의 위헌·위법성, 탄핵소추의 정당성 등을 두고 3시간 20여 분간 열띤 공방을 벌였다. 윤 대통령 측 조대현 전 헌법재판관은 젖은 눈으로 변론했다. “공산주의 좌익 세력이 국회의 과반수 권력을 탈취하고 자의적으로 휘두르며 입법권과 탄핵소추권 등을 남용해 국가 기능을 마비시켰습니다. 윤 대통령은 헌법 질서 회복을 위해 헌법에 따라 비상대권을 행사한 것입니다. 야당의 탄핵소추는 대통령을 끌어내려 정권을 탈취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됐다고 봐야 합니다.”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겨울 끝물. 때 아닌 천둥소리에 놀라 내린 눈발에 철 지난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린 그분처럼 저도 말없이 그냥 조용히 내려 잊히지 않는 뇌리 속에 그냥 있다. 생각하면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기 때문일까. 그저 마음의 정처가 없는 것인가. 모든 일이 꽉 막혀 손 써볼 방도가 없는 것인가. 그냥 있음은 아주 힘없는 상태 같기도 하고, 무언가 참기 힘든 걸 참고 있는 뜨거운 견딤의 시간 같기도 하다. 이러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맥 놓은 이 순간에 미묘한 서글픔이 어린다. 피가 빠져나가 버린 듯 이 쓸쓸한 믿음에 어떤 말도 손길도 부질없는 염려일 것 같다. 그저 슬며시 내려앉는 것, 그 또한 그렇게 있어 볼 길밖에 없어 그냥 있는 믿음의 ‘있음’만이 그 마음의 믿음에 어울리리라. 노무현(盧武鉉 1946년 9월 1일 ~ 2009년 5월 23일)은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이었다. 그는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막노동에 뛰어들었다가 독학으로 1975년 4월 30세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1975년 3월 27일자 경향신문 맨 왼쪽 아래 제17회 사법고시 합격자 명단 60명 중 한 사람으로 ‘고졸=노무현’ 바로 위에는 당시 이화여대 89년사에 첫 사법고시 합격생인 ‘이화여대=전효숙’의 이름도 그리고 서울대를 졸업했지만 단국대학원의 지원을 받아 적을 두고 사시에 합격한 ‘단국대학원=조대현’의 이름이 적혀있다. 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수료해야 하는 2년의 사법연수 시절 고졸 출신 사법연수생으로 서울 서소문 사법연수원에 들어간 노무현은 명문 고등학교도 마땅한 대학교도 내세울 게 없어 어울릴 사람이 없었다. 그때 조대현이 노무현을 자신이 좌장격인 7명이 모이는 토론회 멤버로 끼워주었다. 그렇게 사법연수원 시절 같은 반의 비슷한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이 노무현 대통령 당선 후 언론에 의해 ‘8인회’로 명명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조대현과 노무현의 인연은 노 대통령이 집권 이전부터 사석에서 동기 중 가장 존경하는 법조인이라는 얘기를 서슴없이 했다. 노 대통령은 나중에 자서전에 "얼마나 고마웠던지 연수원 시절 내내 가깝게 지냈고, 지금까지도 가끔씩 만나며 친하게 지내고 있다"고 적었다. 조대현은 법관 시절 조용하면서도 강직한 성품으로 선ㆍ후배들의 존경과 두터운 신망을 샀으며 변호사 개업 후에도 사건을 가려서 맡을 정도로 자기관리에 철저한 법조인으로 알려졌다. 서울경제신문 주필을 지낸 후배 김인모가 한국일보 청와대 출입기자 시절이다. 그가 용산고 동창 조대현 판사의 청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날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조 판사야말로 어떤 경우에도 그럴 정도로 청렴하신 바로 그런 분입니다.” 전 헌법재판관 조대현은 유명한 법조인이었고 지금은 존경받는 법조인이다. 그러나 내게는 그가 장로이기에 목사들의 소식지 ‘더굳뉴스’에 소개할 마음이 생겨 인터뷰 요청을 하고 세상에 대해 겸손한 그가 쾌히 허락을 했다. 2017년 1월 22일 주일 그가 장로로 시무하는 일원동의 개포감리교회(당시 담임 안성욱 목사)에서 만났다. 11시 예배가 시작되기 전 개포교회 사무실에서 만나 용산고 20회 동기 동창 사이라 격의 없이 신앙생활에 대해 말을 나누었다. 조대현 장로는 87년 말 망우동 살 때 금란교회 다니다가 일원동으로 이사 와서 개포교회를 다니게 됐다. 개포교회는 1985년 1월 6일 안성옥 목사가 대신교회 개포 구역을 중심으로 일원1동 654-2호에서 첫 예배를 드리고 같은 해 1월 20일 일원1동 677-1 소재 건물 지하 35평을 얻어 창립 예배를 드렸다. 1977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후 육군 법무관을 마치고 1980년부터 서울민사지법에서 판사 생활을 시작한 조대현 장로는 판사가 된 지 5년째일 때 교회가 설립된 지 2년 된 개척교회에 다닌 초창기 교인인 셈이다. 그로부터 대법원장 비서실장, 대전고법 부장판사, 법원 행정처 인사관리실장 등 법원 내 요직을 두루 거치고 헌법재판관 재직 중인 24년 뒤 그는 2009년 12월 6일 감리교 교회 권사에서 장로로 피택을 받아 장로안수를 받았다. 그는 2018년 1월 9일 자신의 신앙생활의 변환기에 대해 행한 간증에서 이렇게 말했다. “장로가 되어 헌법재판관 임기가 끝나기 두 달 전인 2011년 5월 초 아내에게 끌려서 처음으로 기도원에 가서, ‘헌법재판관 임기를 마치면 무슨 일을 할까요’하고 기도했는데 두 말씀이 제 마음에 박혔습니다. 첫날 저녁에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이었고 다음날 새벽에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섬겨라’는 여호수아 24장 14절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판사로 일하기 시작한 뒤 1981년 서른 살이 넘어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1주일에 60시간 이상 판사 일을 했기 때문에, 주일 예배만 간신히 참석할 뿐, 성경을 읽지도 못했고 성경공부모임에 참석하지도 못했습니다. 그 동안 공직 업무에 바쁘다는 핑계로 신앙생활을 소홀히 했으니 이제는 열심히 믿으라고 하시는 당연한 말씀이네라 생각하고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퇴임 후 여행을 다니기로 하고 첫 번째로 2011년 8월 터키 여행을 갔습니다. 그런데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저려서 1시간이상 걸을 수가 없어 정작 그렇게 원하던 여행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귀국하자 허리 치료를 받느라고 잔뜩 세웠던 여행계획을 모두 접어야 했습니다. 그 때 생각이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시려고 이제는 제대로 믿으라고 일깨우는 말씀을 2011년 5월 기도원에서 석 달 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내가 무시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 마음대로 세운 인생계획을 수정하도록 몰아가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허리를 치료하느라 돌아다니지 못하니 기도원에서 은혜 받은 말씀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점점 생각이 깊어졌습니다. 제대로 믿는 게 뭐지. 믿는다는 게 뭐지. 무얼 믿는 거지. 왜 믿어야 하지. 그런데 평생 법관을 지낸 제가 아무 것도 대답할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성경을 읽고 신앙서적을 읽으며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2년 남짓 공부하던 중 2012년 2월 말경 예수전도단 김지태 대표님으로부터 시니어 DTS(Discipleship Training School: 12 주간의 강의와 가르침으로 시작하여 약 12주의 전도여행으로 이어지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예수전도단의 집중적인 제자훈련 프로그램) 학교가 3월 5일 개학한다는 말을 듣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내와 함께 시니어 DTS학교에 지원했습니다. 60세 이상 성도들이 8개월간 예수제자훈련을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시니어 DTS학교에 가서 그곳에서 일하는 간사님들이 여호수아 24:14 말씀대로 하나님을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섬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진정한 제자의 모습을 보고 배우게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시니어DTS학교에서 말씀 묵상과 하나님의 음성 듣는 훈련을 받게 하셔서, 하나님의 인도를 제대로 받는 방법을 배우게 하셨고, 2012년 8월 10일간의 전도여행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구체적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DTS의 전도여행은 여행계획을 미리 세우지 않고 지갑과 휴대폰 없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훈련입니다. 어디로 갈지, 며칠간 머물지, 무엇을 할지 등을 그때그때 하나님께 여쭙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훈련입니다. 그 후 기도를 많이 하는 아들이 2014년 2월부터 3월 복음학교에 가라고 강권했습니다. 복음학교에 가서 내 생각이 옳다는 생각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2014년 6월 2일부터 7일까지 순회선교단 복음학교에 가서 복음 공부를 했습니다. 김용의 선교사님 혼자서 하루 15시간씩 강의를 하시더군요. 성령이 충만한 하나님 일꾼은 저런 분이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강의 내용은 단순하고 강력했습니다. ‘오직 예수, 십자가 복음만이 살 길이다.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태어나라. 제대로 믿어라. 세상의 가치에 이끌려서 생명의 길에서 벗어나지 말아라.’ 복음학교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2014년 6월 11일 제가 형사피고인으로 기소되었습니다. 공직에서 퇴직한 제가 대한감리회 재판위원으로 봉사하던 중 2013년 9월 감독회장 당선이 무효라고 판결했습니다. 그리고 그 판결에 불복한 당선자가 그 판결이 무효라고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서, 제가 감리회의 당선무효판결은 정당하다는 답변서를 작성하여 제출하였습니다. 그 답변서를 작성하면서 감리회 직원이 저의 요청과 감독회장 직무대행의 지시로 감독회장 부하인 행정실장의 사무실 책상 위에 있던 증거서류를 꺼내왔다는 이유로, 그 직원과 감독회장 직무대행과 제가 공모하여 행정실장 사무실에 무단침입을 했다는 죄목이었습니다. 제가 기소되자, 모든 신문과 방송이 크게 보도했습니다. ‘재판관이 재판받다.’ 빅 뉴스였죠. 그 결과 제가 평생 쌓은 명예가 산산조각 나버렸습니다. 제가 기소된 사실은 범죄가 되지 않는 사실이었습니다. 평생 법조인으로 살아온 저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억울하다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마 10:29)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제 아들이 하나님께서 드디어 아버지를 손대기 시작했으니 기뻐하고 감사드리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의 말과 같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니, 불평하는 마음이 사그라지고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그러자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네가 법관의 경력과 명예를 나에게 내놓으려 했느냐.’ 저는 판사와 헌법재판관으로 지내면서 저의 명예를 아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제가 판사와 헌법재판관으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경력이나 명예를 제가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임을 망각하고 나의 공적이라고 내세우는 짓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네가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에서 거주하며 네 소유가 풍부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신 8:12-14)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신 8:17) 하나님의 은혜로 인생살이가 형통할 때 교만의 죄에 빠지기 쉬우니 조심하라고 경고하시는 말씀인데 제가 바로 거기에 걸린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저를 형사피고인으로 세우시고 언론에 대서특필되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제가 아끼는 세상 명예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라고 생각하니, 형사피고인 처지에서도 마음이 평안해졌고, 기자들이 심경을 물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내 명예를 내려놓게 하신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복음학교의 가르침에 따라 가장 가치 있는 것, 하나님, 그리스도 구원의 복음,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깨닫고자 노력했습니다.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성령님의 깨우치심이 저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새벽 기도 시간에 앉아 있으면, 목사님을 통하여 필요한 말씀과 교리를 가르쳐 주시기도 하고, 제가 찾던 성경 말씀이 저절로 생각나기도 하고, 제가 알지 못하던 진리가 떠오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컴퓨터에 앉아 원고 정리 하는 것이 참으로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의 신앙생활이 너무 부족하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합격 판정을 받으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을 전 헌법재판관 조대현 장로가 자신의 소속 감리교 교단 교권 다툼 끝에 피소되어 법정에 서게 되었다. 2014년 7월 3일 오전 11시 올곧은 법관 조대현이 서울법원종합청사 522호 법정 피고인석에 섰다고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모든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나중 무죄가 되었지만 그 때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심경을 묻는 신문기자에게 전 대통령 이명박 장로와 달리 한국 교회 신앙 역사에 남을 말을 했다. “하나님께서 내 모든 명예를 내려놓으라고 (이런 일을) 하게 하시나봅니다.” 개포교회 장로(長老) 조대현(曺大鉉, 1951년 2월 11일 ~ )은 대한민국의 법조인이다.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지냈다. 1951년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태어났다. 용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였고 단국대학교 대학원 재학 중 1975년 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판사가 되었다. 1977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후 육군 법무관을 마치고 1980년부터 서울민사지법에서 판사 생활을 시작한 조 변호사는 대법원장 비서실장, 대전고법 부장판사, 법원 행정처 인사관리실장 등 법원 내 요직을 두루 거쳤다. 수학 교사로 시작해 서울 언주중학교 교장을 지낸 헌신적 사랑과 눈물의 기도로 평생 내조한 서외순 권사와 두 아들을 두었다. 조대현 장로가 그 바쁜 법관 생활 속에서도 어릴 적부터 책상을 마주하고 직접 가르친 쌍둥이 아들 둘 다 직업도 쌍둥이 법조인(변호사)으로 활동 중이다. 로마의 황제 첫 번째 칭호는 princeps 즉 제일(第一) 시민(市民)이다. 그렇듯 전 헌법재판관 조대현 장로는 그의 법관 경력이나 기독교 신앙이나 세상 삶에서 대한민국 제일(第一) 법관(法官)이라 말해도 그를 아는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3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 1:1-5 2018-02-25 2025-01-2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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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24
  • [더굳뉴스] 어린 왕자 소강석 목사
    프랑스 공군 비행사이자 작가인 생텍쥐페리(Antoine Marie Jean-Baptiste Roger de Saint-Exupery, 1900년 6월 29일~1944년 7월 31일 추정)가 1943년 발표한 소설 '어린 왕자'(Le Petit Prince)는 아동 소설이자 유작이기도 하다. 아주 작은 소행성에서 살고 있던 어린 왕자는 매일 아침, 별을 구석구석 청소하고 꼼꼼하게 살폈다. 장미와 구별해서 바오밥나무의 싹을 뽑아내는 일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무가 자라 뿌리를 깊이 내리면 별이 파괴될 수도 있었다. 귀찮았지만 하루도 쉬지 않고 나쁜 싹을 골라낸 덕에 어린 왕자는 별을 지킬 수 있었다. 반면 어느 게으름뱅이의 별은 바오밥나무로 뒤덮이고 말았다. 어린 왕자는 경고한다. ‘바오밥나무를 조심해!’ 정직이 최선의 계책(計策)'이라는 서양 격언도 이 땅에 건너오면 바보들이나 믿는 말이 된다. 법에 훤하고 그런 법 지식을 악용하는 무리 탓이다. 영국의 배우, 코미디언, 영화감독이자 음악가로 무성 영화 시기에 크게 활약한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 1889년 4월 16일 ~ 1977년 12월 25일)은 말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사람의 마음에는 장미 씨앗이 있고 바오밥나무의 싹도 있다. 괜찮겠지, 하며 일찍이 골라내지 못한 나쁜 씨앗들이 맹렬히 자라 지금 우리의 터전을 무섭게 집어삼키고 있다. 2024년 연말 소강석 목사가 겪은 사고를 2025년 1월 12일 새에덴교회 주보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에 실렸다. 아포리즘(aphorism)이란 깊은 진리를 간결하며 압축된 형식으로 표현하는 짧은 글의 형식이다. 제가 지난 12월 2일 저녁에 잠자다 오른쪽 발뒤꿈치가 전기장판에 저온화상(저온이라는 용어 때문에 일반 화상보다 경각심이 낮지만, 초기 증상만 경미할 뿐 오히려 장시간에 걸쳐 조직 손상이 깊은 곳까지 이뤄지면 피부조직 괴사, 가피 형성, 궤양 등 심각한 손상을 입을 수 있다)을 입었습니다. 그날 저는 저온화상인지도 모르고 주일 낮 예배와 5부 예배 성찬식까지 다 인도했습니다. 전기장판에 화상을 입을 줄이야 저도 몰랐고 주변 사람들도 몰랐습니다. 나중에 화상인 출 알고 연고를 바르고 항생제와 소염제를 먹었습니다. 약간의 차도가 있는 듯했지만, 저는 계속해서 박순애 전도사님 초청 집회 시간마다 무릎을 꿇고 기도했고, 이후로 교역자 연말 정책 수련회와 루체비스타 성탄절 행사를 준비하고 이끌어야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CBS 설립 70주년 및 여러 교계 행사 모임에도 다 참석을 했습니다. 집사람은 빨리 화상 전문병원으로 가보라고 했지만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아서 가지를 않았습니다. 그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만약 화상 전문병원에서 입원하라고 했더라면 교역자수련회나 루체비스타 성탄절을 이끌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성탄절 예배와 송구영신 예배도 이끌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니. 신년 축복 성회도 감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사이사이 나름 드레싱을 하고 연고를 바르고 약도 처방하여 먹었습니다. 그러다가 모든 집회가 끝난 후 1월 5일, 첫 주일 저녁 예배를 마치고 이재훈 목사님을 오시게 해서 화상을 입은 뒤꿈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자 이 목사님께서 화상 전문시스템을 잘 갖춘 대학병원에 연락했고. 저는 다음 날 오전 11시 응급 처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강제 입원을 하고 말았습니다. 화상 전문 성형외과 선생님은 저한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환자분님, 큰 교회를 섬기고 목회하는 분으로 들었습니다. 이 발뒤꿈치를 앞으로도 10년 아니 20년 이상을 써야 할 텐데 왜 이렇게 방치하셨습니까?" “저는 이렇게 말씀을 드렸죠. ‘교수님, 나름 드레싱을 하고 연고도 바르고 약도 먹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다시 말씀하시는 거예요” "왜 이렇게 병을 키워 갖고 오셨어요? 처음에 바로 왔으면 간단하게 처치할 수 있는 것을 왜 이렇게 먼 길을 돌아왔습니까?" 그러자 또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렸죠 “어느 교회든지 연말연시는 다 바쁩니다. 특별히 저는 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화를 내시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한 해만 목회하시려고 하십니까? 앞으로 10년, 20년 일을 하셔야 하는데요? 조금만 늦게 오셨으면 뒤꿈치를 절단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런 시급함을 모르신다는 말입니까?“ 병실에 누워 있자 얼마나 답답하고 하루가 긴지요. 아무리 기도를 하고 성정을 봐도 하루하루가 길게 느껴졌습니다. 매일매일 반복적으로 염증 부분을 잘라내는 아픔, 억지로 피를 나오게 해서 생살이 돋아나게 하는 처치의 시간은 참으로 고통스럽고 가슴 저리기까지 하였습니다. 3일째가 되자 그토록 엄격하고 원칙적인 주치의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피부 이식 수술은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잘 치료하면 빨리 새살이 돋아날 것 같습니다." 금요일 오후에는 국소 마취를 하여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염증을 제거하였습니다. 제가 휠체어를 타고 가서 설교하면 안 되냐고 했더니 그분은 말했습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번 주를 잘 참아내면 다시 후회 없이 발바닥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병실에 앉아서 생각해 보니 아쉬운 부분이 많이 있었습니다. 다른 일정을 다 취소하고 일찍 화상병원에 갈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때 당시로서 저는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쉬운 마음이 있는 건 분명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 병실에서 오직 하나님을 생각하고 성도 여러분을 생각하며 인생의 새로운 또 다른 페이지를 써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신년집회가 끝나면 쉬고 치료를 받으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더 엄격하게 강제적으로 치료를 받게 하시네요. 성도 여러분에게 심려를 끼쳐서 죄송하고 제가 더 새롭고 신선한 얼굴로 뵙겠습니다. 여러분 모두를 사랑하며 축복합니다 “나를 길들여 줘, 부탁이야!”라며 어린 왕자에게 특별한 존재의 소중함을 가르쳐준 사막의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말했다. “만약 오후 4시에 네가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새에덴교회 성도들에게도 소강석 목사는 언제나 그런 ‘어린 왕자’일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7-8 2025-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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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15
  • [더굳뉴스] 부산 아우구스티누스 허은 목사
    지난 2017년 대통령 선거 막바지에 민주당의 공동선대위원장인 이해찬씨는 말했다.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다음에는 안희정·이재명·박원순 같은 사람이 이어서 쭉 장기 집권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보수 세력을 완전히 궤멸시켜야 한다.” 보수 진영으로서는 ‘싸가지 없는 소리’였겠지만 이제 윤석열 정권이 들어선 지 2년 반이 지난 이 시점에서 어쩌면 이해찬씨의 말은 그냥 흘려버릴 말이었던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말한 세 사람 가운데 사법 위기에 허덕이는 이재명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들은 먹은 것도 없이 겨우내 버틴 몸으로 꽃까지 피워내야 하는 것이 봄이다. 새싹이 온몸으로 흙을 밀어 올려야 하는 것도 봄이다. 그건 정말이지 하나님이 모든 생명이 아무도 모르게 잠들 수 있도록 이마를 쓰다듬어 주시는 은총이다. 인간의 공로보다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한 아우구스티누스(354년 11월 13일 ~ 430년 8월 28일)가 말했다. "사랑이 있고 소망이 있어야 없는 것을 본다. 소망이 없으면 눈에 안 보이는 것을 보지 못한다."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이름은 '작은 아우구스투스'라는 뜻으로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서 따온 이름이다. 427년 반달족(게르만족의 한 민족)이 북아프리카를 쳐들어왔을 때 피난민들이 전쟁을 피해 아우구스티누스 감독(bishop)이 살고 있던 히포에 쏟아져 들어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감독이었으므로 안전한 곳으로 찾아가거나 교회에 은둔할 수도 있었지만, 기꺼이 피난민들을 위해 봉사했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 감독은 430년 8월 28일, 반달족이 히포를 점령하기 얼마 전(반달족의 히포 점령은 431년의 일) 피난민들을 돌보다가 걸린 열병으로 7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이 땅의 삶을 끝내는 순간까지도 전쟁으로 두려움에 빠진 난민들을 돌보며 피난처를 제공하였다. 이는 "우리의 이웃이 하나님께 관심을 가질 때 그들에게 자비롭게 대하는 행동은 우리를 불행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행복에 이르게 한다"는 자신의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고백록'에서 말했다. "물체는 제 중심에 따라서 제 자리로 기웁니다. 중심이란 꼭 밑으로만 아니고 제 자리로 기웁니다. 불은 위로 향하고 돌은 아래로 향합니다. 제 중심을 향해 움직이면서 제 자리를 찾습니다... 그런 질서가 덜한 곳에는 불안하고 질서가 잡히면 평온해집니다. 제 중심은 저의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어디로 이끌리든 그리로 제가 끌려갑니다. 주님 은사로는 저희가 불타오르고 위로 이끌려갑니다. 타오르면서 갑니다." 2023년 3월 16일 오후 2시 부산 연제구 연산 8동에 있는 동현교회의 주민을 위한 무료 카페에서 지용길 목사와 함께 허은 목사와 대담을 나누었다. 지형적으로 저지대에 위치해 도로여건이 열악하고 인근 주민과의 관계성이 낮아 지속적인 인구 유출과 고령화로 인한 사회적 쇠퇴가 가속화되고 있는 곳이다. 2022년 5월 21일 입당 감사예배 및 헌당식을 드린 산등성이 동네 한가운데 있는 지상 4층, 지하 1층의 예배당은 아늑했다. 연산동을 아우르는 연건평 511평의 예배당은 주변 개발지역과는 달리 지형적인 한계로 인해 소외받았던 연산8동과 어울려 아담했다. -여기는 언제 자리 잡으셨습니까. "지난해 5월에 입당했습니다. 아직 1년이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총회 부서기 마치고 그해 2021년 12월에 공사 시작해 서기 임기 중(2022년 5월)에 완공이 됐습니다." -많이 바쁘셨을텐데. "네. 교회 일과 총회 일이 겹쳤습니다. 교회 장로님들, 집사님들 많이 수고하시고 정말 은혜중에 잘 마쳤습니다. 이 지역은 주로 서민들이 많이 삽니다. 주택가 한가운데 있고 도로변에 있지 않아서 불리한 면이 있는데 오히려 동네 가운데 있어 조용하고 지역 주민들하고 가깝게 지내니까 좋습니다. 이 카페는 무료 카페입니다.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차 빼서 마시고 우리 교회 교역자 집사님들이 순번을 맡아 봉사를 합니다." -이런 교회 카페는 못 본 것 같은데요. "여기는 어려운 분들, 독거노인들이 많아 지난해 5월에 입당하면서 전체 100개 가정에 쌀, 라면을 동사무소를 통해 전달했습니다. 지난 연말 성탄절에 2백 가정에 한 상자에 105만 원 상당의 생필품을 전달했습니다. 그야말로 지역에 있는 교회로서 지역민과 함께하려고 합니다. 우리 사회가 초고령화 사회로 가니까 교회 안에도 어르신이 많고 교회 주변 이웃에도 어르신이 많습니다. 다음 세대도 잘 키워야 하지만 이 어르신들에게 천국 기실 때까지 여러 가지 책임을 져주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장기적으로 집이 나고 교회가 살 여력이 되면 이런 어른들을 1인 1실, 혹은 2인 1실로 30분 정도 천국 가실 때까지 모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제가 사회복지학도 전공해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땄습니다. 요양보호사 자격증도 따고 요양시설을 운영하면 외부 시설장을 모셔야 되는데 제가 자격증을 따니까 경비도 줄이게 되죠. 그런데 교회가 작지만 아담하게 세워지니까 주변 지역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어 여기로 보내셨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전에도 그랬습니다만 최근에도 우리 장로님들께서 '목사님 꿈꾸고 계시는 그 일을 현실화시켜봅시다. 교회 짓고 1년도 안 됐으니까 준비가 되면 옆에 있는 건물 하나 사 가지고 우리 형편에 맞게 부속건물 지어 청소년, 아이들, 청년들 교회 와서 마음껏 공부하고 놀 수 있게 자리 만들어줍시다. 그 위에는 어르신들을 모시고 우리가 평생 책임져주고 하는 일을 생각하고 준비해가고 있습니다. 작지만 아담하게 지역민과 함께하는 그런 교회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동현교회는 개척하셨나요, 부임하셨나요. "제가 2대 목사입니다. 1대 목사님이 다른 교회를 섬기다가 나오셔서 성도 30여 명하고 한 가정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다 그 어려운 시절에 소금공장도 하시고 빌려서 예배드리셨습니다. 제가 보니 전월세를 일곱 군데나 다니셨습니다. 그러다가 작은 주택을 하나 매입해 예배당을 짓고 IMF가 올 당시 빚이 상당했습니다. 저를 후임으로 오라 했습니다. 당시 목사님이 협심증으로 건강이 많이 안 좋으셨습니다. 숨이 차서 설교를 잘못하셨습니다. 그때 제가 담임목사로 부임을 하고 1년 뒤 다 물려받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전임 목사님이 인천 길병원에서 수술하고 좋아지셨습니다. 건강이 좋아지시니 3년 동안 안 물려주시는 겁니다. 3년 뒤 위임투표를 해 물려받긴 했습니다. 물려받은 뒤 있던 교회를 매각하고 다른 교회를 사서 리모델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는 우리에게 부담이 됐습니다. 그러다가 그 교회가 너무 도시 중앙이고 환경이 유흥가라 장기적으로 볼 때 어렵겠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코로나 시국인데 장로님들과 뜻을 모으게 됐습니다. 그리고 마침 여기 집 네 채가 한 날, 한 시 동시에 계약이 됐습니다. 그 네 집을 한 필지로 묶어 헐어내고 건축을 했습니다. 그리고 2021년 12월에 공사 시작해 총회 서기 임기 중인 2022년 5월에 완공이 됐습니다." -은혜롭고 순적하게 성전 건축이 됐군요. "그런데 막상 와보니 없는 사람이 많은 동네라 교회가 제대로 되겠나 싶은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 좋아하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예배당을 건축하고 옥상에 올라가 보니 왜 이곳으로 하나님이 보내셨는지 환하게 이해가 됐습니다. 주변에 대단지 아파트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습니다. 성벽처럼 싹 둘러싸고 있고 딱 우리 교회가 서 있는 주변에 서민들이 사는 고만고만한 건물만 좍 있는 겁니다. 그 가운데 우리 교회가 서 있는 겁니다. (나중에 올라가 보니 정말 그랬다.) 어려운 분들 사는 가운데 교회가 있고 그 주변에는 대단지 아파트가 병풍처럼 좍 서 있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곳에 교회를 세우셨는가. 그래 이분들 섬기라고 하나님께서 이곳에 교회를 세우셨구나 하는 생각으로 받아들이고 말씀을 들을 때 성도들의 생각이 이제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라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곳에 세워주셨다. 그렇게 해서 작지만 차근차근 우리 힘에 맞게 지역도 섬기고 또 우리 노회 장로회에서 해외 개척 선교를 하겠다 해서 단독으로 하기에는 좀 버거운 게 있고 해서 우리 교회하고 노회장 노회하고 절반씩 힘을 보태 캄보디아에 교회를 하나 세웁니다." 그 관련 기사가 '기독신문'에 다음과 같이 실렸다. 동부산장로회 임원들은 부산 동현교회(담임 허은 목사) 성도들과 함께 2023년 2월 27일부터 3월 2일까지 캄보디아를 방문하고, 천준상, 이숙영 선교사가 사역하는 바탐방지역을 탐방했다. 이 지역에서는 약 20평 규모의 비전교회 예배당을 신축하고 이 일대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중고대학생 52명이 생활할 수 있는 EDM선교센터를 증축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동부산장로회와 동현교회는 이 공사에 들어가는 비용 4천만 원을 함께 감당하기로 했다. 허은 목사는 지난 2021년 9월 제106회 총회 서기 직무를 시작하면서 다짐했다고 한다. “총회 서기는 총회 소속 노회와 교회의 분쟁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해야 하는 직분이지만 법과 원칙을 지키며 어떤 외압에도 바르게 섬기겠다.” 부산 아우구스티누스 허은 목사는 제107회 총회선거관리워원회 서기로서 제107회 총회 불꽃 권순웅 총회장의 클린개혁을 떠받칠 제108회 총회 임원과 상비부 선거를 깨끗하고 투명하고 공정한 선거를 관리해야 되는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했다. 낳아주신 어머님, 길러주신 어머님을 다 같이 진심으로 섬겼던 효심을 그리고 이 땅의 삶을 끝내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신념을 따른 아우구스티누스처럼 동현교회와 총회를 섬길 것이라 믿는다. 그리면 제104회 총회장 이승희 목사가 총회 석상에서 "당신 같은 사람이 총회장이 되어야 한다"고 한 예언이 이루어질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 11:1-3 2024-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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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29
  • [더굳뉴스] 소강석 추수감사절 가수 시인 목사
    한 가수가 나타나기까지 그의 인생은 저 멀리서 천천히 달려온다. 가수는 새로운 창조라기보다 믿음과 예정의 두 대상이 만나야 할 지점에 정확히 도달하는 ‘예정된’ 탄생이라고 할 수 있다. 소강석은 그렇게 이 시대가 원하는 달란트와 현실의 지분을 조화롭게 장착한 채 세상에 나왔다. 가수 소강석이 사랑받는 이유는 그가 요셉처럼 꿈 많은 자기를 지키며 사랑했기 때문이다. 남을 즐겁게 하면서도 자신이 망가지지 않는 법을 쾌활한 그가 우직하게 보여준다. 믿음의 사랑은 격정 어린 투정이 아니라 진공관 라디오 주파수처럼 지직거리며 끈기 있게 맞춰가는 것이라고. "나는 좋은 목사입니까?" "당신은 좋은 신자입니까?" 그 무겁고 순진한 질문을, 나와 네가 연결되어 그 믿음이 완성된다는 진실을 믿음의 절창으로 가수 소강석이 알려줘서 고맙다. 물든 잎새 뒹구는 가을 끝자락 1620년 신대륙 플리머스에서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을 지킨 청교도들(Puritans)처럼 찬송하기 참 좋은 계절이다. 그리고 시인 소강석은 프리즘을 통과하는 빛처럼 세련된 영롱함 보다 마치 장난감이 귀하던 시절에 신기하기만 하던 만화경 속의 모습과 닮았다. 대도시의 세련미 나는 모습과는 반대로 오래된 벽시계의 늘어진 추 같은 느릿함과 골동품 냄새가 풋풋하게 나는 그런 투박함과 우아함이 공존하는 모습이다. 또 목사 소강석은 공원에서 겨울을 버티고 있는 크고 푸르른 침엽수 같다. 또 다른 모습의 소강석은 무겁고 느릿한 숨소리 사이사이로 온갖 새싹이 움트고 새들이 찬양하는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을 전하고 찬송하는 목사이다. 나의 느낌이 아직은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흐릿하더라도 천연색으로 복원하면 생동감 넘치는 소강석 목사의 모습이 2024년 11월 추수감사절에 하나님의 은혜로 우뚝 선 새에덴교회에서 가수, 시인, 목사로 선명하게 나타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성경은 말씀한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찌로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시 107:1, 8-9 2024-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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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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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믿음의 정치인 안상수
    안상수 의원 1946년 태안군 출신 기독교 정치인 하나님 영광을 위해 정치는 그만둬도 믿음 생활은 그만둘 수 없을 것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을 인용 해양수산부는 세월호 인양 결정 3월 23일 아침 신문 뉴스 세월호 인양 예부터 한국인의 큰 관심사는 정치이다. 이제 큰 선거들이 다가오니, 정치가 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루 내내 밤중 내내 모든 일은 모두 정치이다. 정치가 번창하는 가운데에도 사람들은 죽고 동물은 죽고 집들은 불타고 들녘은 황폐해져 상황은 정치적이지 않던 태곳적과 다름이 없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햇빛 밝은 아침 강가의 나무 밑에 정치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전혀 중대한 사건이 아니어서 역사에 기록되지 않을 것이다. 덧없이 지나가는 순간에도 많은 과거가 있다. 강물은 상류로부터 내려오고 구름은 바람에 불려 왔다가 다시 불려 간다. 강기슭의 자갈도 돌아든다. 개미와 풀밭과 물결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그 나름의 모양과 인과가 있다. 그래서 세상의 아름다움은 고통과 슬픔에 대한 위안이다. 또한 정치는 시한폭탄이다. 15시 30분에 터지게 되어 있는 폭탄이 장치된 장소에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마지막 사람은 40초를 남겨 두고 일단 나왔다가 안경을 찾으러 들어간다. 그리고 증오처럼 폭탄이 터진다. 사람의 감정이 만들어내는 것에는 나쁜 것이면서도 화려하고 장엄한 것이 있다. 증오가 그것이다. 증오는 정치를 움직이는 동력이 되기 쉽다. 증오는 사람을 열광하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장애물을 타고 넘을 수 있게 한다. 증오는 아름다움을 창조한다. 그것은 한밤중 찬란한 불꽃을 만들어내고 장밋빛 새벽에 폭발하는 거대한 폭탄을 만들어낸다. 사회와 국가 그리고 정의도 그것으로 힘을 얻는다. 작은 것들이 삶의 내용이 되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우리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아이러니는 그것들을 지탱하는 정치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작은 것들의 옹호가 바로 정치를 위한 교훈이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을 몰랐다고 할 수는 없다. 영문도 모른 채 가라앉았던 세월호가 과거의 세월처럼 떠올라 모든 것이 정치가 된 이 시대에도 이런 아이러니는 믿음의 교훈을 가지고 있다. 3월 23일 아침 신문을 펼치니 세월호를 인양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바닷물에 살짝 잠긴 세월호의 옆면 사진이 보였다. 시커멓게 물때가 끼고 녹슬어 있었지만, ‘SEWOL’이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보였다. 그 배는 바다 속에 1073일이나 빠져 있었다. 그 사진을 보며 연대표(timeline)와 역사(history)의 차이가 세월호처럼 떠올랐다. 사실 나는 2014년 4월 16일 그 배로 제주도 이도교회 김성욱 목사를 인터뷰하려고 가족 동반 예약을 했다가 한 주 연기해 화를 면한 믿기 어려운 인연도 가지고 있다. 연대표에서 사건들은 독립적으로 기록된다.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을 인용했고 또 같은 날 해양수산부는 세월호 인양 결정을 내렸다고 연대표는 기록한다. 그러나 역사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 독립적인 사건들을 서로 연결해 인과관계를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박근혜가 내려가니 세월호가 올라오네’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 인과관계를 알아내는 데 대단한 통찰력이 필요하진 않다. 그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영어로 ‘공통 감각’(common sense)이라고 말할 때의 상식(常識)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사실 앞에서 의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충돌 등 외부 요인이 없는 한 여객선은 침몰하지 않는다. 종이배도 아니고 항해하다가 넘어지는 배라니 상상할 수도 없다. 만에 하나 침몰한다고 하더라도 구명정도 있고 탈출 시간도 충분하니 승객들은 대부분 구조된다. 완전히 배가 뒤집어질 때까지 객실에서 대기하다 빠져나오지 못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대규모 참사가 예견되는 상황에서 대통령은 정부의 모든 역량을 구조에 집중하라고 신속하게 지시한 뒤 상황을 점검할 것이다. 우파든 좌파든 내성적이든 외향적이든 그게 대통령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대통령의 일을 하기 위해 기도하는 정치인이 있다. 그는 안상수 의원(자유한국당)이다. 지난 미국 대선에 나온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는 장로교 신자이고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는 감리교 신자였다. 미국에서는 아직 대놓고 무신론을 표방하는 정치인은 대통령이 되기 힘들다. 우리나라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추세다. 우세한 힐러리를 누르고 당선된 트럼프 대통령은 안상수 의원이 인천시 시장이던 시절 사귀어 잘 아는 사이다. 어쨌든 마르틴 루터(1483~1546)가 1517년 10월 31일 오후 2시 독일 비텐베르크 성(城)교회의 대문에 면죄부(indulgence)의 문제점을 지적한 ‘95개 논제’를 붙여 종교개혁을 촉발하지 않았다면 장로교도 감리교도 없었을 것이다. 공항 선교의 대부 김길수 목사(함남노회 주예수사랑교회)의 소개로 3월 15일 2시 30분 안상수 의원을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사무실에서 만났다. 서로 인사를 나누자 내가 기독교 기자라는 걸 배려한 듯 안상수(安相洙, 1946년 5월 28일 ~ ) 의원의 첫마디는 이랬다. “제가 자유한국당의 말하자면 국회신우회 회장입니다. 우리는 그걸 기독인회 회장이라고 하는데 그걸 위촉받아서 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남대문교회를 다녔습니다. 그 계기가 경기고등학교 재학 시절 입주 가정교사를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가르치는 학생의 어머니가 교회 권사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주급을 주셨는데 교회 다녀온 것을 확인한 뒤에 그것을 주셨습니다. 참 덕스럽고 지혜로운 분이셨습니다. 그분 덕에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죠. 그간 신앙생활의 부침은 있었지만 50여년 신앙을 지키고 있습니다. 정치에 입문하고 그 부침에 따라 기복은 있었지만 오히려 역경 때문에 신앙의 뜨거움과 간절함은 더 강해지고 깊어졌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직업이 된 정치는 그만둘지라도 믿음 생활은 그만둘 수 없을 것입니다.” 안상수 의원은 1946년 5월 28일 태안군(당시는 서산군) 출생한 기독교 정치인이다. 민선 3, 4기 인천시장을 지냈다. 인천 계양구·강화군 갑 지역구에서 제15대 국회의원으로도 활동했었다. 제18대 대통령 선거 새누리당 경선에 참여했으나 5위로 떨어졌다.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인천 서구 강화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인천시장 재임기간 동안 송도국제도시를 조성하였다. 한국에서 국고 지원 없이 민간자본으로 건설된 최초의 도시이다. 송도를 세계적인 도시로 키우겠다는 목표아래 컨벤션 센터, 국제학교, 박물관, 생태관, 문화센터, 잭 니클라우스 골프 클럽, 동북아 트레이드 타워(NEATT), 퍼스트 월드 주상복합, 센트럴 파크 등을 조성하였다. 특히 안 시장은 뉴욕주립대학교 분교를 비롯한 연세대학교, 인하대학교 등 국내외 명문대학교를 유치하였다. 그 결과 녹색기후기금(GCF) 사무국과 글로벌녹색성장연구소(GGGI) 송도사무소,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위원회(ESCAP)가 들어서게 되었다. 안상수가 인천시장 임기 초 2002년에 시 예산이 2조 7000억원이었는데 2009년에는 세 배인 7조 5000억원으로 불어났고 아파트와 토지 등 시 전체 부동산 가치도 80조원에서 200조원 규모로 상승하였다. Q 어디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십니까 “인천광역시 소재 계산중앙교회에서 감리교 권사로 22년 봉직하고 있습니다. 주일성수는 물론이고 새벽기도도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 참석하고 있습니다. 제가 신앙생활과 정치생활에 잣대로 삼는 말씀은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는 요한일서 2:16입니다. 이것을 늘 묵상하고 마음에 새기는 이유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아닌 세상의 쾌락과 교만은 자신의 삶을 타락과 부패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Q 로마 정치인 키케로는 ‘이 세상에 정치만큼 즐거운 것은 없다’고 했는데 안상수 의원님은 왜 정치를 하십니까 “믿는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저는 그 일의 보람을 정치를 통해 날마다 체험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막힌 곳을 뚫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굽은 것을 펴는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할 때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그 일이 저를 만족과 기쁨으로 충만하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에 금한 동성애같은 문제를 막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그 결과 인천시 시의회에서 2016년도 동성애 관련 법안 통과를 막는데 힘을 보태기도 했습니다.” Q 크리스천 정치인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구현되게 하기 위해 쓰임 받는 하나님의 도구라고 하는데 의원님은 이러한 정의에 동의하십니까 “당연히 동의합니다. 우리 기독교인 정치인들은 더욱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Q 동의하신다면 그 동안의 정치 행보에서 크리스천 정치인으로서 하나님이 뜻을 위한 어떤 비전을 갖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으로 심각하게 분열되어있는 우리나라를 대통합하여 갈등 없는 하나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정치인이 되겠습니다.더 나아가 기독교를 배척하는 북한 정권을 흡수해 통일 대통령이 되기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Q 크리스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김영삼, 이명박 전 대통령들에 대한 공과를 기독교적 시각에서 평가 부탁드립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어려운 시기에 대한민국 수립에 기초를 만드신 어려운 일을 하신 분으로 인정됩니다. 그러나 측근 비리로 타국으로 망명하여 생을 마감하신 분으로 안타까운 마음 금할길 없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 중 금융실명제등으로 금융 흐름을 명백히 하여 여러 가지 비리를 척결하는 큰일을 하셨지만 마찬가지로 측근비리와 가족비리로 지탄을 받은 일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4대강 공사 등 수자원 확보와 토목건설을 통하여 경제성장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여러 가지 사회갈등으로 계획대비 큰 효과를 이루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제가 믿음의 정치인으로서 대통령이 된다면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고린도전서 10장 31절 말씀을 따라 하나님 나라와 그 영광을 위한 믿음의 청지기가 되겠습니다. 그러한 대통령의 제 모델은 지미 카터 대통령입니다. 어려운 환경과 검소한 생활 속에서 늘 기도와 간구로 어려운 약자를 생각하는 대통령이셨고 퇴임하시고도 교회학교 교사와 전 세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집짓기 운동을 조용히 전개 하고 계시는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 어머님은 나를 서울로 보낸 후 기차표 한 장을 더 사셨다. 그리곤 세상 밖으로 나가선 안 돌아오셨다. 나를 떠난 후 지상의 어느 곳에도 남아 있지 않는 사람 자신의 가슴속이 지상의 마지막 역이 되는 사람이 있을까. 제물포역 대합실 의자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난다. 자동차가 불타고 돌멩이와 각목이 난무하던 초겨울 어느 날. 산동네 가파른 골목 끝 내가 살던 빛바랜 판잣집 뒤뜰에는 아침 안개에 젖은 나무줄기와 이슬 맺힌 잔가지들을 참새 서너 마리가 총총 뛰고 있었다. 순간 크나큰 믿음이 이 세상 가득 출렁인다. 살았던 일이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믿음은 편하다. 비가 되어 쏟아져버리는 먹장구름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죽음이고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믿음은 편하다. 믿음의 정치인 안상수 의원의 정치여정도 그러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 기독교인들은 오랜 만에 만나는 믿음의 정치인 안상수를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그를 통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2017-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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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3-29
  • 총회 역사가 김정훈 목사
    총회 아이티헌금 부스러기 6억 2천 2층 슬라브 700평 10개월 만에오나빌기독교학교 건축 하나님 은혜 문제에는 반드시 답이 있다문제에 함몰돼 시간과 돈을 소모하는 것이 더 큰 문제 그는 그간의 행적에서 보여주듯총회 역사를 기록하는 역사가이면서 총회 역사를 보존하고 세우는 역사가 사람들은 저마다 말한다. 어제가 묻힌 무덤들이 역사라고 지금이 현재이고 내일이 미래이며 어제가 과거이고 역사라고 한다. 하지만 오늘도 어제가 될 것이고 내일도 어제가 될 것이니 종국에는 모든 삶은 어제가 될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어느 순간에서 미래의 어느 순간까지를 살고 있다. 한 치의 공간도 허락하지 않는 수많은 점들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달려가는 하나의 직선 위 우리는 그 어느 선분만큼만 살아갈 뿐이다. 말하자면 그날까지 이어질 총회 역사 안에서는 오늘도 역사이고 내일도 역사이니 사는 순간순간이 또 하나의 총회 역사이다. 그런데 정작 그 역사란 무엇인가. 할리카르나소스의 헤로도토스(대략 기원전 480년경~420년경)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이다. 헤로도토스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탐구를 통해 『역사』를 저술했다. 그의 책 제목인 ‘역사’는 그리스어 ‘히스토리아이’를 번역한 말인데 이는 ‘히스토리아’의 복수형이다. 당시 ‘히스토리아’는 ‘탐구’ ‘탐구를 통해 얻은 지식’ ‘탐구결과에 대한 서술’이라는 뜻을 지닌 말이었다. 그것을 통해 헤로도토스는 고대 이후 역사서술을 대표하는 인물로 간주되고 또 키케로는 그를 ‘역사의 아버지’라고 평가했다. 그러면 헤로도토스는 과연 어떤 점에서 ‘역사의 아버지’라는 평가를 받는 것일까. 헤로도토스의 역사인식이 잘 드러나 있는 대목은 그의 저서 『역사』의 서문이다. “할리카르나소스 태생 헤로도토스는 인류의 업적을 후세가 잊지 않고 그리고 그리스인 및 그 밖의 민족들의 훌륭한 발자취가 길이 남도록 하기 위하여 여기에 자신의 탐구 기록을 펴낸다. 특히 여기서 무슨 이유로 이들이 서로 전쟁을 하게 되었는지 들어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책은 기원전 490년에서 479년까지 이어진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기원에 대한 자신의 '탐구'를 기록한 것이다. 특히 다른 문헌이 거의 없는 이 시기의 이야기 자료를 기록하였고 그 밖에 자신이 지중해와 흑해 주변의 여러 지역을 널리 여행하면서 접한 여러 장소와 사람들에 대한 긴 여담도 많이 썼다. 그의 기록이 완전히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자신이 들은 것만 기록했다고 주장하였다. 성경에도 자신이 들은 것만 기록했다고 주장한 해로도토스와 비견될만한 인물이 있다. 그는 헤로도토스보다 200여년 앞서 기원전 607년에 예레미야서 36:1-18에 등장하는 바룩이다. 예레미야 36장 4절과 17-18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4 이에 예레미야가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부르매 바룩이 예레미야의 구전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두루마리 책에 기록하니라 17 그들이 또 바룩에게 물어 가로되 네가 그 구전하는 이 모든 말을 어떻게 기록하였느뇨 청컨대 우리에게 이르라 18 바룩이 대답하되 그가 그 입으로 이 모든 말을 내게 베풀기로 내가 먹으로 책에 기록하였노라 제99회 총회(총회장 백남선) 회록서기로 총회 회의 역사를 기록하고 그 자신 역사를 사랑하고 보존을 위해 실행하는 김정훈 목사는 2015년 8월 28일 기독신문 퇴임 인터뷰에서 역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미래의 거울입니다. 100년 교단의 역사를 정리한 역사자료실을 꼭 만들어 교단의 정체성과 역사를 손쉽게 접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이번 총회에서 역사위원회가 설치되면 좋겠습니다.” 그는 이 바램대로 제100회 총회(총회장 박무용)에서 총회역사위원회가 허락되고 초대 위원장이 되었다. 그를 2017년 1월 8일 부산 새누리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당회장실에서 만났다. 두루마기를 입은 김정훈 목사는 말했다. “우리는 편하게 이렇게 삽니다. (그는 붉은 가로46배판 양장에 금박으로 새긴 총회역사화보를 내밀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설립 100주년 기념판이었다.) 제가 위원장 되어 만든 책입니다. 이게 87년 만에 만든 겁니다. 정준모 총회장 때 너무 어렵고 그러니까 역사 자료 그런 게 만들기가 참 힘들었어요. 그래도 뭔가 남겨놓으면 이걸 기초로 해서 뭘 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에 2012년에 이걸 만들었어요. 시간과 경비가 참 많이 들었습니다.” -아이티 오나빌 학교 세우신 것 좀 말해 주세요. 아이티 구호헌금 29억 가운데 7억이 남았었는데 그걸로 건축을 하신 거죠. “6억 2천 가지고 700평을 건축하고 나머지는 1년 유지비로 사용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2016년 3월 13일자 국민일보에 따르면 2016년 3월 10일 한국교회봉사단과 월드디아코니아가 아이티 카라콜에 직업학교 건축을 하는데 22억 들어갔다면서요. “3년 걸려 25억 들었다는 국민일보 기사를 봤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총회 아이티헌금 남은 부스러기 6억 2천으로 700평 2층 슬라브를 10개월 만에 건축한 것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010년 1월 12일 현지시각 오후 4시 35분 1인당 국민소득이 하루 2달러로 절대빈곤 상황에 있는 아이티에 리히터 7.3의 지진이 발생해 11만 2250명의 사상자와 19만 4000명의 부상자, 그리고 수백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최초 지진 발생 이후 전국 교회 모금 29억을 통한 교단의 구호사업이 22억이 목적 외로 사용된 사건이 드러나 그 연루자들에 대한 책임공방이 4년여 이어졌다. 그러다 아직 남은 7억조차 다른 용도로 쓰려는 시도가 이루어지는 와중에 2014년 제99회 총회(총회장 백남선 목사)에서 아이티 재난현장의 학교 건축이 정식으로 총회에 헌의되고 총대들의 뜨거운 허락을 받았다. 총회는 아이티에 뒤늦게나마 오나빌기독교학교 건축추진위원회(위원장 정용환 목사)를 조직했다. 당시 건축위원회 서기를 맡아 총회 위상을 일으켜 세우는 역사적인 실무를 챙긴 김정훈 목사는 말했다. “건축위원회 서기로 실무를 감당하며 건축에 만일 차질이 생기면 교회와 제가 다 책임을 지겠다는 결심과 각서까지 제출해 놓고 시작한 일이었기에 눈물이 많이 났습니다. 앞으로 이 학교가 지역의 희망이 되고 총회의 자랑이 될 것입니다.” 2010년 1월 강도 7의 지진피해로 사망이 30만 명에 이르는 재난을 당한 아이티에 총회(총회장 박무용 목사)가 늦게나마 따뜻한 구호의 손길을 내밀었다. 총회는 2015년 11월 18일 아이티공화국 오나빌시에서 오나빌기독교학교 준공 및 개교감사예배를 드렸다. 아직까지 재난의 후유증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오나빌 지역 주민들에게 기독교학교 준공식은 축제였다. 김정훈 목사는 그 감격을 이렇게 말했다. “아이티구호헌금 잔액으로 기독교학교를 건축함으로 전국 교회의 정성어린 헌금을 본래 목적대로 어려운 아이티를 위해 쓰게 돼서 기뻤습니다. 학교뿐 아니라 교회와 주민진료소까지 마련돼 보람이 큽니다.” 김정훈 목사는 당시 오나빌기독학교 준공 기념사진을 보여 주며 현황을 설명해 주었다. “이게 지난해 사진들입니다. 이거 건축을 해놓고 총회에서 1년 운영비는 대줬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아무런 대책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총회가 2천만 원을 후원했습니다. 한 달에 부활절과 성탄절이 있을 때는 7천5백불 들어갑니다. 그 다음에는 7천불씩 들어가는데 이제 자체에서 학생들에게 1불씩 수업료를 받고 매점 운영하고 치과의사 부부가 진료해 2천 불 수입을 올립니다. 그래서 한 달에 그곳 운영비로 5천불씩 후원이 필요합니다. 하다못해 김선규 총회장을 고문으로 하고 김재호 목사를 이사장으로 하고 내가 회장하고 이래가지고 지금 반강제적으로 후원을 받아 보내고 있습니다.” -후원 모금 광고를 해야겠네요. (장내숙 사모가 거들었다.) “언젠가는 자립을 해야죠.” “자립하도록 하려고 도와주고 있는 거죠. 관리에 대해서는 총회 결의가 GMS가 하도록 했지만 재정은 도와주지 않습니다.” -언제 결혼하셨습니까. (장내숙 사모가 웃으며 말했다.) “저희 84년도에 결혼했으니까 33주년인가 34년인가. 잘 모르겠네.” -34년 전에는 김정훈 목사님이 별 볼일 없었을 텐데요. 사모님은 선생님도 하시고. “제가 고등학교 교사이면서 뭐 하나님에게 괘씸죄에 걸려가지고 사모가 된 것 같아요. 아니 친구가 사모 되겠다는 데 아주 막무가내로 말렸거든요. 사모 되는 거 아니라고(웃으면서) 그런데 제가 사모가 됐어요. 꿈도 꾼 적이 없는데... 그런데 사모 되려는 사람 말렸으니까 대신 제가 괘씸죄에 걸려 사모가 되고 말았어요. 그러면 니 한번 해보라고...” (김정훈 목사 흐뭇한 표정으로) “제가 뭐든지 빨리 일을 하는 성질이라.” (장내숙 사모 환한 웃음을 지으며)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김정훈 목사 말을 이어) “두 달 만에 결혼을 했습니다.” -어떻게 소개를 받아 인연이 되었습니까. “그런데 저희 교회에 노총각 전도사가 부임하셨는데 중고등부를 맡으셨어요. 저는 중고등부 교사였어요. 그래도 들은 건 있어서 결혼을 위해 방학을 하자마자 한얼산기도원에 올라갔어요. 사람들이 방학 때면 엄청나게 많아요. 2년간 결혼을 위해 결혼을 해오던 터라 작정기도를 하고 딱 내려왔어요. 그리고 학교에 시무식을 하려고 갔는데 전도사님한테서 만나자고 전화가 온 겁니다. 그런데 제가 너무 눈치가 없어가지고 저한테 청혼을 하는데 그 말을 못 알아들었어요. 얼마나 눈치가 없으면 땀을 뻘뻘 흘리듯 어렵사리 얘기를 하는 거예요. 사임할 각오로 결혼을 해야겠다고. 그러면 전도사님 결혼 해야지요 하고 맞장구를 쳤어요. 도와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도와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게 저라고 전혀 생각을 못했습니다.” “(김정훈 목사 조용한 웃음) 그런데 남편이 자꾸 이야기를 하는데 방향이 좀 이상한 거예요. 그래서 학년 초이고 제가 중고등부 교사라 반 배정 같은 거 의논하러 전화하신 줄 알았죠. 어떻게 보면 제가 사모되려는 생각은 없었지만 장애인을 위한 사명도 주셨고 대학원 진학도 계획하고 원서도 받아놓고 있던 터였어요. 그렇게 계획을 하면서 배우자를 놓고 집중적으로 기도를 했어요. 내려와서 딱 출근한 첫날 전화가 와서 대화를 하다 보니 내가 결혼 대상인 겁니다. 나는 아니라고 했는데 본인은 사임을 해야 되니 불쌍하잖아요. 내가 보자고 해서 절대 사임하시면 안 된다며 없던 일로 하자고 했어요. 그랬더니 남편이 교사 기도보다 전도사 기도를 하나님께서 더 많이 들어주실 거라는 겁니다. 그래서 딱 잘라 거절을 못하고 기도는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는데 남편은 그런 배짱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내가 결혼하겠다고 한 마디도 안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까 그것도 두 달 사이에 다 이루어진 겁니다. 결혼할 준비도 아무것도 안되어 있고 우리 아버지는 딸이 귀하다고 일찍 결혼 안 시킨다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도 남편은 자꾸 와서 딸을 주십시오 하며 저희 아버님한테 부탁을 화는 겁니다. 그런 남편의 열심에 우리 할머니께서 저리 달라는데 줘라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갑자기 두 달 만에 결혼을 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사모님 다니신 교회는 어디입니까. “서성로교회입니다.” -우성기 장로님 시무장로하시던 교회군요. “네. 우성기 장로님 저희 가족을 무척 아껴주시고 김정훈 목사를 아주 사랑해 주셨어요.” -놀라운 일이네요. 우성기 장로님 총회 정치인으로 유명하신 분이죠. “그분이 제가 그 교회 부임해가 두 달 동안 잠바 입고 출근해 전부 정리하기 시작했어요. 교회 찬양대 등 온갖 부서를 반듯하게 정리했어요. 저를 무척 좋아하시고 누구든 우 장로님 위해서 기도하면 우 장로님 무릎 딱 꿇으시고 기도하셨습니다. 게다가 우 장로님은 돌아가시기까지 저를 위해 기도해 주셨어요. 제가 거기서 배운 게 목회자가 장로보다 하나님 더 사랑하고 교회 더 사랑하고 기도 더 많이 하고 성경 더 많이 보면 존경받는다는 걸 서성로교회에서 배웠습니다. 총회를 위해 두루 일하시던 장로님이셨는데 정말 돌아가실 때까지 부족한 저한테도 참 잘해 주셨어요.” -사모님 성함은 어찌 되십니까. “장내숙입니다. 촌스럽죠.” -그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독특한 이름이신데요. 내 자가 무슨 자입니까. “이에 내(乃) 자입니다. 베틀에 이에가 있습니다. 베틀에 날실과 씨실을 번갈아 교차시키면서 하나의 천이 짜여지는데 그 베틀의 두 다리 사이에 가로지른 나무를 이에라고 합니다. 저희 어머니가 그러시는데 저희 집안에 주의 종이 없는데 그렇게 이에처럼 교회에서 쓰임 받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뜻으로 제 이름을 그렇게 지으셨대요. 저희 집안에서는 목회자가 없다보니까 전도사가 와서 딸을 달라하니 전도사 배경이 어떻든 주의 종이니까 거절을 못해서 일찍 결혼시키고 싶지 않았지만 순종한 게 저희 아버지 믿음이셨죠.” -김정훈 목사님 겉보기와는 달리 아주 당차신 분이네요. “우리 목사님은 청년들한테도 상대방이 좋아하든 말든 신경 쓰지 말고 니가 좋으면 자신의 믿음대로 밀고나가라고 하십니다.” “내가 좋아하면 되지만 상대가 나를 아무리 좋아해도 내가 싫어하면 안 되니까 저는 제가 마음먹어 버리면 평생 그냥 가니까요. 김선규 목사님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죠. 처음 GMS 들어갈 때 한번 GMS 총회 갔는데 이사 아닌 분이 회계를 하겠다는 겁니다. 그 당시 그분이 정치 핵심 세력이었어요. 그건 아니잖습니까. 그런데 아무도 발언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뒤에는 또 다른 핵심 중 핵심도 있으니 GMS 내에서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끝까지 선교회가 원칙이 무너지면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자리를 원하는 목사님을 위해서도 그렇고 옆에서 하라 한다고 이사도 아닌 분이 이사회 임원하면 나중에 어떻게 되겠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야유하고 야단났어요. 그런데 결국 그렇게 됐어요. 그러고 GMS에 들어가게 되었죠. 영남 쪽 임원 찾다보니 그 사람 선교 많이 하는데 누구지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선교회 들어가 김선규 목사님하고 그때부터 같이 일하게 됐죠. 그 뒤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지냈습니다. 제 스타일은 절대로 나서지 않습니다. 일이 주어지면 확실하게 하고 그 다음에 그늘에서 늘 전체적인 조정을 하고 받들고 그럽니다. 모든 일을 그렇게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저를 잘 모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무슨 일을 맡기면 무엇이든 확실하게 정리하고 해나가는 게 제 성격인 것 같습니다.” -목회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제가 이 교회 부임해서도 제 편을 만든 적이 없습니다. 아무도 내 제자를 만들지 않고 단지 주님 편만 만들었습니다. 목회를 그렇게 바로 하면 다 내 편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 기준을 가지고 목회를 하니까 교회도 그런 면에서 자유롭습니다. 제가 여기 와서 21년 동안 당회나 제직회나 공동의회나 한 번이라도 언성을 높여본 적이 없습니다. 모든 절차는 다 밟고 논의하지만 무슨 회의든 10분 걸릴 정도로 짧습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유롭고 은혜롭게 진행합니다.” -선교에 대한 열정은 언제부터 가지게 되었습니까. “처음 목회할 때부터 있었는데 부산에서 땅 사 건축해 지은 돈보다 부채가 더 많은 5년 된 용산교회에 와가지고 큰 사건이 생겨 교회가 망하는 법은 없지만 주변에서 전부 망했다고 할 정도가 됐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학교 가니까 옆의 아이들이 그러더라는 겁니다. 그런 해결될 수 없는 여건 속에서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해결된다는 확신을 주셨습니다. 그때 교회 부흥 때까지 기다리던 선교의 마음이 지금 순종해서 선교하겠습니다로 바뀌었습니다. 그랬더니 부흥하게 되더군요. 참 재미있었습니다. 그때 다 망한다는 교회에 교인들은 안 믿는 남편 깨워 새벽기도 보내주고 개인택시 하는 분이 시내에서 운전하다가 집에 와서 아내 태워 교회 데려다 주고 가고 기적 같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김정훈 목사는 그간의 행적에서 보여주듯 역사를 기록하는 역사가일 뿐만 아니라 역사를 보존하고 세우는 역사가이기도 하다. 그는 2013년 제98회 총회 부회록서기 2014년 제99회 총회 회록서기로 총회 임원으로 2년의 섬김과 아이티 오나빌기독교학교 건축 같은 실무 봉사를 통해 총회 위상을 회복하고 총회역사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총회 역사관 개관을 앞두고 있다. 그는 2016년 4월 기독신문에 총회를 위한 자신의 비전을 이렇게 밝혔다. “목사로서 본분과 의무를 다하며 품격 있게 교회와 교단을 섬길 것입니다. 교단의 정체성을 토대로 평화통일 준비와 세계선교 선교 교회 부흥과 자립지원에 힘을 쓰며 사회에 희망을 주는 교단이 되는 일에 미력하나마 힘을 보탤 것입니다. 우리 총회는 무한한 저력과 희망이 있습니다. 문제에는 반드시 답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에 함몰돼 시간과 돈을 소모하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문제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정리하고 풀어 총회가 도약하고 발전했으면 합니다.” 2017-02-11
    • G.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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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2-16
  • 호렙산 불꽃 권순웅
    권순웅 목사 목회 철학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꿈을 버리지 않고 비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 무엇을 얻을까 바라는 거지인생이 아니라 보내심을 받은 자로 사명 줄을 잡고 살기 때문 열정적인 호렙산 불꽃이 되어 그의 공약 3R로 총회를 개혁해 다시 세우고 존중받게 만들고 모든 목사 장로 애곡 속에 떠나기를 남몰래 조금은 늦은 것들이 있다. 늦게 온 것들은 고요하고 스산하다. 늦게 오는 것은 저마다 그늘진 사연이 있다. 늦은 것의 쓸쓸함과 고요함과 심란함. 너무 늦게 찾아와 주목받지 못하거나 쓸모없어진 것들. 그러나 누가 그 순서를 정했더라도 더딘 것은 더딘 데로 존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도 언젠가 소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권순웅 목사가 그렇다. 호렙산의 불꽃을 보고 뒤돌아선 모세처럼. 2016년 12월 4일 11시 주다산교회 예배에서 성경을 읽을 때 다 일어나고 영상 모니터에 성경 구절이 비치지 않았다. 교인 모두는 성경을 펼쳐 들고 읽었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신명기 32:7-14 권순웅 목사가 성경을 한 손에 받쳐 들고 강단에 섰다. 그가 입을 열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오리가 아니라 독수리같이 입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광인론(광인이란 말은 그 스스로 지은 말로 미치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를 만들 수 없고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제자훈련에 미쳤다는 광인론 목회철학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내 목회철학을 이렇게 말씀하고 싶습니다. 나의 목회철학은 오리지날입니다. 이것은 오리가 지랄하면 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웃음) 제가 말씀하는 이 광인론은 절세미인과 같습니다. 절세미인은 절에 세 들어 사는 미친 인간을 말합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기도하는 데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셨습니다. 구호를 외쳤는데 미쳐라였습니다... 우리는 오리 같은 뒤뚱거리는 신앙이 아니라 독수리 같이 날아오르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독수리가 날개를 치고 바람의 기운을 타면 비상합니다. 우리도 성령의 바람을 탈 때 독수리같이 올라가게 됩니다. 독수리 같은 믿음의 성도는 하나님께서 높여주시고 멀리 보게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인본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적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훈련하는 것 같이 자기 백성을 훈련시키십니다. 본문 신명기 32장 11절과 12절은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나라의 암담한 현실은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교육에서 일파만파 드러나고 있습니다. 자녀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 참 안타깝습니다. 저도 아이가 하나뿐이라 고민이 많았습니다. 애가 중학생 때 학교에서 자꾸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나는 몰랐는데 우리 집사람이 학교에 많이 불려갔습니다. 중3 때 목사의 딸이 노랑머리가 되어 교회에 나타났습니다. 기절할 지경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계속 감동을 주시는 것은 이삭처럼 모리아산에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부녀지간의 인연을 끊고 독수리가 그 새끼를 키우듯이 그냥 던져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데 던져버릴 때 없나 찾았습니다. 그것도 돈 안 들고 말입니다. 탈북자선교회 미션홈이 떠올랐습니다. 중국 신양(허난 성에 있는 도시인데 허난 성은 인구는 가장 많고 경제적으로는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꼽히는 곳)의 촌 한구석에 있는 곳입니다. 우리 아이에게 ‘너 중국으로 유학가라’고 말했습니다. (큰 웃음) 우리 아이는 북경이나 상해를 생각하고 좋아했습니다. 한번 가볼래 했더니 싱글벙글했습니다. 그 당시 겨울이라 밤이 되면 영하 30도 40도가 되는 곳이었습니다. 사실 나도 그곳이 그렇게 어려운 곳인 줄은 몰랐습니다. 갔더니 화장실이 재래식인데 유리창도 없고 비닐로 휘감아 놓은 곳이었습니다. 영하 30도 40도 되니 볼 일을 보면 그대로 쌓여 탑이 되었습니다. 제가 사용해 보니 이게 바로 똥침이구나 하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웃음) 그리고 숙소는 탈북자나 조선족이니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기숙하는 곳이었습니다. 세면은 식당 안에서 물을 데워 얼굴을 씻고 2주에 한번 신양에 있는 공중목욕탕에 가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그 목욕탕에 가보니 물이 설렁탕 국물 같습니다. 때가 허옇게 둥둥 떠다녔습니다. 우리 아이가 거기 일 년 있었는데 살려달라고 사정했습니다. 아빠 시키는 대로 다 할테니 제발 살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후에 복을 주셨습니다. 미국 유학 문을 열어주시고 밥존스 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컬럼비아 대학교를 거쳐 이번에 총신을 졸업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독수리 같은 훈련이 없으면 바로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고난과 연단이라는 방법을 통해 그 백성을 훈련시키십니다. 저는 우리 민족이 지금 연단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이 고난이 우리에게 복이 될 줄 믿습니다...” 권순웅 목사가 고등학교 때 일이었다. 친구의 형이 교통사고로 죽었다. 명문대에 다니던 그는 청운의 꿈을 가진 고시생이었다. 시신을 수습하고 화장을 했다. 허름한 장례식장은 을씨년스러웠다. 주변은 가을 산이었다. 단풍색깔도 처량하게 보였다. 친구 어머니의 통곡이 그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멍하게 장례를 지켜보았다. 끝나고 식사를 했다. 그때 교회 어른이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하셨다. “산에 오니 밥맛이 좋다.” 그 한마디가 믿음이 연약한 그에게 비수같이 꽂혔다. 친구 어머니의 애곡 때문에 숨도 제대로 못 쉬던 그에게는 충격이었다. 후일 깨달았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우셨다.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을 아시면서도 우셨다. 예수님은 인간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는 자들을 아파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영남대 경제과 재학시절 이념서클을 이끌었던 운동권 출신이었다. 졸업 후 취직해 대기업 마케팅 업무를 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 후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이 땅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신앙공동체를 만들겠다고 결심하고 1989년 총신대 신대원에 들어갔다. 총신대 신대원에 진학한 그는 학교 뒷동산에서 기도하던 중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SPARK(불꽃) 운동’을 목회비전으로 세웠다. SPARK는 S(Scripture 성경) P(Prayer 기도) A(Action 삶) R(Revival 부흥) K(Kingdom of God 하나님 나라)의 약어다. 그는 보기와 달리 1955년생이라 총신 78회 정도 되어야 하는데 33살 늦깍이 신학생으로 출발해 37살에 졸업한 총신 84회다. 그런 그가 2016년 9월 26일 오후 10시 20분 총회임원 선거로는 유일하게 정상적인 경선이 이루어진 총회 부서기 선거에서 총 1369표 중 808표를 얻어 558표에 그친 경쟁자를 제치고 총회 부서기에 당선됐다. 능금이 그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지는 올 가을에 권순웅 목사는 제101회 총회의 New Spark 새 불꽃이 되어 전국 교회와 총대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불꽃은 연소(燃燒) 반응 시 빛나는 밝은 바깥 부분이거나 타는 불에서 일어나는 붉은빛을 띤 기운이다. 권순웅 목사는 1992년 5월 서울 방이동 상가건물에 개척했다. 소외된 자들을 대상으로 한 철저한 차별화 전략을 내세웠다. 초창기엔 ‘이러다가 교회 문을 닫겠구나’라는 위기감도 들었지만 뿌려진 전도의 씨는 결국 자라고 열매를 맺었다. 2000년 100명 성도를 넘기더니 이듬해엔 장년만 200명 넘게 출석했다. 그 즈음 이사야서 43장 5절을 통해 확신을 얻은 그는 경기도 화성으로 이사하기로 결정했다. ‘민족과 세계를 구원하는 한국 교회의 모델’이 되려면 좀 더 넓은 터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그때는 동탄 신도시 발표가 나기 전이었다. 교회 이름도 ‘새술’에서 ‘주님이 많이 낳으신다’는 의미의 “주다산”으로 바꿨다. 2001년 8월 화성시 반월동에서 18가정이 초라한 천막교회로 시작했다. 그러다 2014년 4월 19일 경기도 화성시 반송동 160에 종교부지 2000평 건평 2500평 2500석의 예배당을 최대 저렴하게 최고의 기능을 지향해 세웠다. 그는 교회를 지으면서 건축비 절감을 위해 지하를 파지 않고 세웠다. 그리고 재정 여력이 생기자 옆의 땅을 사들여 지하 공간을 파는 것보다 교회 땅을 더 넓힌 지혜를 발휘했다. 교회에서 좀 떨어진 곳에 32400평의 산도 가지고 있다. 지금은 2500명 성도가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했다.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꿈을 버리지 않고 비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무엇을 얻을까 바라는 거지인생이 아니라 보내심을 받은 자로 사명 줄을 잡고 살기 때문입니다.” 경기도 화성시 반월동 주다산교회 교인들이 매일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한 장짜리 전도지엔 이 같은 축복의 글이 적혀 있다. 권순웅 목사의 매주일 저녁예배 설교를 요약한 것이다. ‘예수 믿으세요’란 소책자나 말 대신 축복을 전한다는 의미에서 축복전도법이라고 불린다. 효과가 있을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서울에서 목회하면서 이미 임상실험을 거쳤습니다.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종이 한 장 나눠주고 축복해주는 게 전부지만 10번 이상 계속 만나다 보면 결국 우리 교회 교인이 되더군요. 예수님도 복음을 전하실 때 축복을 선포하셨습니다. 불신자와의 최고 접촉점은 바로 축복입니다.” 권순웅 목사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기업체에서는 마케팅 부서에서 일했다. 축복전도법을 굳이 마케팅 개념으로 보자면 탁월한 일대일 마케팅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전도받은 자들을 위해 주다산교회는 셀을 통해 양육을 한다. 또 대공동체 사역을 영적 시스템화하여 연간 진행한다. 신년금식집회, 새기비(새벽기도비전), 블레싱데이 그리고 매주일 저녁에 드리는 신앙의 명가 세우기 예배, 하나님 나라 금요집회 등을 통해 성령이 역사하시는 역동적인 대그룹사역을 진행한다. 그는 이 중심을 영적리더십으로 보고 있다. 이것으로 주님의 리더십이라는 관점으로 선교학 박사를 취득했다. 저서로는 ‘예수 스파크셀 리더십 이야기’ ‘스파크 양육교재’ 15권(공저)이 있다. 권 목사는 총신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을 강의하며 예수 스파크셀 세미나를 연간 2회 진행하면서 전국교회 목회자를 돕고 세우고 있다. 제101회 총회에 뉴 스파크 새 불꽃으로 등장한 총회 부서기 권순웅 목사가 앞으로 지켜야 할 공약 3R(Reformation 총회개혁 Rebuild 총회 다시 세우기 Respect 총회 존중)을 내세우며 관심을 가지게 된 총회 형편은 어떤가. “이게 총회냐”라는 목사나 장로의 볼멘소리가 가슴을 친다. 그렇다. 이 몰염치한 거짓과 탐욕 만연한 요령과 눈치 온갖 탈법과 불공정이 판치는 곳을 총회라고 할 수 없다고 개탄도 했다. “언젠가는 나아지겠지” 하면서 희망도 가졌다. 그런데 알고 보니 우리 모두가 그 공범자들이었다. 실은 이 총회도 힘들게 만들었다. 목사가 된다는 것은 교인들이 주일마다 한 움큼씩 보태는 성미에 의존해 산다는 것을 의미할 때도 있었다. 그 가운데 교회가 성장하고 교인이 늘어나고 서울역 근처 건물에 세 들어 있다가 지금의 어엿한 건물을 지닌 총회와 총신이 되었다. 어찌 되었든 총회의 이 모든 것은 그 시절 이영수 목사의 공로가 없었다면 장자교단이라는 말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을 것이다. 박윤선 목사를 중심으로 갈려나간 개혁 측의 현실을 보면 감이 잡힐지 모르겠다. 총회가 개교회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고 본이 되지 못하니 노회와 교회도 교인들의 원망을 사고 있다. 그러한 현상은 교인의 노회와 총회에 대한 무관심을 낳았다. 폴란드 공산당이 조직한 반유대주의 축출운동에 의해 1971년 망명한 이후에 영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1925. 11. 19.-)은 나치 박해의 희생자였던 마르틴 니묄러의 사례를 들려준다. 처음에 나치는 공산주의자들을 체포하러 왔다. 니묄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기에 가만히 있었다. 다음엔 노동조합원을 잡으러 왔다. 그는 노조와 연관이 없었으므로 침묵했다. 그다음에는 유대인 그다음엔 가톨릭교도를 잡으러 왔지만 가만히 있었다. 마침내 나치는 니묄러를 잡으러 왔지만 그때에는 다른 누군가를 옹호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눈앞에서 총회와 노회와 교회의 크고 작은 불의가 일어날 때 우리가 침묵하고 자신의 안전과 신앙만을 생각한다면 결국 궁극적으로 위협받는 것은 우리 자신의 안전과 신앙이다. 우리에게는 가만히 있지 않을 신앙의 권리 더 나은 삶을 선택할 권리 일시적인 안전과 보신보다는 더 많은 사람과 함께 누릴 수 있는 양심의 자유와 신앙 인권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본성을 추구하고 지킬 권리가 있다. 한 해를 돌아보는 저마다의 가슴속에 ‘내가 더 많이 노력했어야 하는데’라는 자책보다는 ‘나’와 내 교회를 넘어 ‘우리’가 함께 선택할 수 있는 더 나은 신앙의 바른 삶에 대한 강한 소망이 싹틀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성경은 말씀한다.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출애굽기 3:1-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 이십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애곡하는 기한이 마치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일을 애곡하니라 신명기 34:4-8 소설 혼불의 작가 최명희의 문학관이 있는 남원 노봉마을에 진눈깨비가 흩날린다. 계곡의 물을 끌어올려 타고 도는 물레방아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움직인다. 거대한 몸집을 굴리기에는 물이 턱없이 모자라 보이지만 물레방아는 쉼 없이 물을 타고 돈다. 개울가에는 아직 잔설이 남아있다. 아침햇살이 비출 때마다 안개분수에서 무지개가 불꽃처럼 빛난다. 아침햇살이 비출 때 마다 물레방아 가의 안개분수에서 무지개가 불꽃처럼 빛난다. 물보라를 흠뻑 뒤집어 남천은 발가벗은 채 얼음 꽃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물레방아 주변 대숲에는 물이 흩날려 안개비가 내린다. 1980년 4월부터 1996년 12월까지 17년간 혼신을 바친 대하소설로 20세기 말 한국문학의 새 지평을 연 기념비적인 작품 “혼불”의 작가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다. 날렵한 끌이나 기능좋은 쇠붙이를 가지지 못한 나는 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생애를 기울여 한마디 한마디 파나가는 것이다. 세월이 가고 시대가 바뀌어도 풍화 마모되지 않은 모국어 몇 모금을 그 자리에 고이게 할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우리 정신의 기둥하나 세울 수 있다면...” 혼불은 일제 강점기 때 사매면 매안마을의 양반가를 지키려는 3대의 며느리들과 거멍굴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선조들의 숨결과 손길 염원과 애증을 우리말의 아름다운 가락으로 생생하게 복원하여 형상화했다. 혼불에서 우러나는 아름다움과 애련함 근엄함과 서러움 밝음과 어둠이 댓바람 소리와 함께 대실을 건너 노봉 마을과 사매면을 감싸고돈다. 1998년12월 11일 아직 써야 할 이야기를 남겨둔 채 향년 51세로 작가는 “아름다운 세상 잘살고 간다”는 유언을 남기고 홀연히 떠났다. 이제 호렙산 불꽃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와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고 여호와의 말씀대로 느보산에 올라 그 조상들에게 떠났다. 그리고 한낱 소설가도 아직 써야 할 이야기를 남겨둔 채 향년 51세로 “아름다운 세상 잘살고 간다”는 유언을 남기고 홀연히 떠났다. 그처럼 권순웅 목사도 혼을 불사르는 열정적인 호렙산 불꽃이 되어 그의 공약 3R로 총회를 개혁하고 총회를 다시 세우고 존중받는 총회로 만들고 모든 목사와 장로들의 애곡 속에 떠날 수 있기를 혼불처럼 소망한다. 2016-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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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28
  • 화순원화교회 변전석 목사
    교회마을 십리 밖에 새벽이면 들려오는 댕그랑앙앙아아 댕그랑앙아 아직도 생생한 40년 전 종소리. 잠에 취하여 일어나 십리 길 멀다 않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새벽마다 달려가던 전남 화순군 도곡면 원화리 원화교회. 솔밭 사이 교회 가는 길 주일 학생들은 솔방울처럼 잘도 굴러가다 유채꽃 고운 밭둑길에서 나비처럼 훨훨 날개를 편다. 양쪽 겨드랑이에 날개 달고 교회 있는 교회 안길로 접어든다. 시골집 골목마다 퍼져 있는 아이들의 들쭉날쭉 맑은 찬송 소리에 교회 창문이 열리면 우르르 따라 들어간 파아란 시골 바람 향그런 꽃냄새 요란하다. 하늘나라 얘기는 교회 안에 재미있게 가득 차 있어 주일 학생 모두 싣고 하늘로 올라간다. 오래된 시골 교회 가는 길은 하늘로 가는 길이다. 그래서 하늘나라 가는 길에 시골 아이들 모여든다. 2016년 11월 30일 11시 총신 재단이사 성수 빌미로 이기창 목사 입원해 있는 전주예수병원 중환자실에서 한다는 말을 듣고 30여분 늦게 도착했다. 그런데 중환자실에 간호사 들어가는 길에 멋모르고 실수로 들어가 보니 회의는 고사하고 방문조차 쉽지 않은 곳이었다. 게다가 총신 재단이사들이 왔다간 낌새도 없었다. 물어보니 간호사도 고개를 흔들었다. 분명히 하루 일찍 내려간다며 총신에서 우연히 만난 안명환 목사와 권주식 목사는 함께 서두르고 있었다. 참석해야 되지 않겠느냐며 전 날 말했던 사람은 오지도 않고 딴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오래 전부터 오고 싶었던 전남 화순의 변전석 목사 시무 교회 원화교회 수요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 두 가지 놀라웠다. 원화교회가 1904년에 설립된 113년 교회이고 수요예배 참석이 5명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 이유는 3년 전 어느 수요예배 때 김관선 목사의 산정현교회에 가보니 10명 정도 앉아 있었고 그 얼마 후 박영선 목사의 남포교회 수요예배는 아래위로 성도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원화교회가 설립된 1904년이라면 2월 8일 러일 전쟁 발발하고 2월 23일 한일 의정서를 체결하고 7월 1일 미국의 세인트 루이스에서 제3회 하계 올림픽이 개최되고 7월 15일 러시아의 작가 안톤 체호프가 죽고 10월 4일 세브란스 병원 개원 후 첫 수술로 백내장 수술을 한 해다. 그토록 오래된 교회에 총회 마당쇠 변전석 목사가 시무하고 있다. 2016-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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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27
  • 주신교회 허활민 목사
    2016년 12월 18일 오전 11시 주신교회에서 총회와 기독신문의 구조조정 대임을 맡은 허활민 목사는 설교에 앞서 기도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수 있도록 아둔한 입술을 풀어주시고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의 심령에 잘 박힌 못과 같이 아로새긴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주장해 주시옵소서. 멀리 출타해서 또 여러 가지 세상 일로 나오지 못한 자들 불쌍히 여겨주시고 있는 그 처소에서도 기도하는 믿음을 갖게 해 주셔서 우리와 같은 은혜를 받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허활민 목사가 고개를 들었다. “올해가 갈 때까지는 지난 주 뭐라고 했죠. 마주 보고 한 사람이 ‘사랑합니다’ 말하면 맞은 편 사람은 ‘미안합니다’ 말한다고 했죠. (성도들이 마주 보고 반복했다.) 우리가 한 해를 보내면서 크리스마스를 앞에 두고 사랑을 받았는데 그만치 보답하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주시는 축복의 자리에 나갈 수 있는 줄 압니다... 임마누엘은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와 가족을 이루어주시고 돌보아주시고 지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복음은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 말씀으로 복음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육신으로 임하셔서 나를 도와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의 축복이 축복 중의 축복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년 구조조정 대상이 될 대상들은 허활민 목사의 이 설교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2016-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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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27
  • 창원반석교회 박종희 목사
    경남동노회 분규 당시 노회장을 맡아 박종희 목사(총신 82회)는 갈팡질팡하는 서광호 대신 분규의 중심에 서서 이단 마귀론에 빠질 뻔한 경남동노회 정통성을 잘 지키고 총회와 협력해 정치력을 입증받았다. 1997년 11월 서광호를 이어 부임한 박종희 목사는 전통적인 목회자의 자세로 교회를 안정시키고 성장시켰다. 2016-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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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27
  • 광주의 어거스틴 채규현 목사
    뉴욕 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소명을 받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방향을 바꿔 세상이 아닌 교회를 위해 목회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 채 목사는 시계수리공 김상술의 톱니에 걸리면서 지옥과 천국을 오가 김상술 정규남 김삼봉 서기행 권재호 이승희 등 조직폭력배부터 최순실까지 이어져 온 나라를 격랑 속으로 몰아넣은 '최순실 게이트'를 닮아 바람이 나무에게 말하거나 나무가 바람에게 말할 때 서로의 몸을 포갠다. 말귀를 알아듣는다는 건 상대의 마음을 그렇게 움직여주는 것이다. 소통은 마음과 마음이 서로 닿아 한결 후련해지는 것이다. 몸은 대상이 ‘의식’되고 지각되는 통로다. 인생이란 어떻게 보면 삶과 역사 그리고 연극이고 그 사이에는 구획이 없다. 왜 세상에는 악(惡)이 존재할까.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 354. 11. 13 ~ 430. 8월. 28)은 악이 선(善)과 별도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선의 부재(不在)’ 상태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라틴어 이름 아우구스티누스는 ‘좋은 징조의’ 또는 ‘덕망 있는’이란 뜻의 라틴어 아우구스툼(Augustum)에서 유래하였다. 인류의 과거와 미래를 두고 세계 영성계를 강타한 책이 있다. 그것은 어거스틴의 “고백록”(Confessiones)이다. 이 책은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의 수많은 저서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지고 가장 많이 읽히는 기독교의 중요 고전 중의 하나다. 참회록이라고도 할 때가 있지만 이것은 적절한 제목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어거스틴이 하나님께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께 “찬양”의 고백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책 제10권 이하에서 어거스틴은 그의 인간론 시간론 성경해석 방법론 등을 개진하기 때문에 그의 신학 사상과 철학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책이다. "고백록"의 전반부는 젊은 시절의 방황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기까지 기나긴 회심의 과정을 진솔하게 기록하고 있다. 또 "고백록"의 후반부는 세계의 기원과 시간문제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주를 이룬다. 그의 고백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의 이름은 어거스틴이고 이 책은 나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나의 하나님이신 당신을 찬미하기 위해 이 책을 씁니다. 나는 당신을 잃어 비참했고 당신을 찾아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는 당신을 찬미하고 싶습니다. 나는 나와 같은 다른 죄인들을 위해서도 이 책을 씁니다. 그리하여 그들도 평화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이집트 사막에서 기도하며 사는 안토니오의 이야기는 비수처럼 나의 마음을 꿰뚫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 사악하고 추잡했음을 알았습니다... 나는 우리 집 뒤에 있는 정원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나는 땅 위에 쓰러져 이마를 때리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하나님 나는 왜 지금 하지 못합니까. 왜 지금 나의 온 마음으로 당신을 의지하지 못합니까. 하나님 지금 그렇게 되게 해주십시오.. 갑자기 나는 근처 정원에서 한 어린 아이가 ‘그것을 손에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 노래하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나는 아이들이 이런 말로 하는 놀이가 있는지를 기억해 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나는 그것이 성서를 펴서 읽으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이라고 생각하고 성서를 펴자 내 눈에 로마서 13:13-14 말씀이 들어왔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나는 더 이상 읽지 않았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넘치는 기쁨이 나의 마음에 가득 찼습니다. 나의 의심덩어리들과 두려움들은 끝났습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지배하는 사상은 "그때까지 나의 생활은 나 자신의 것이었으나 그 후부터 나의 생활은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생활"이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신앙을 가지기 전 세계 도처에서 온 사람들로 붐비고 온갖 사악함으로 가득 찼던 당대의 명문 카르타고 대학을 다녔다. 그처럼 채규현 목사도 신앙을 가지기 전에는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1981년 미국 뉴욕 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미국유학을 떠났다. 그런데 그곳 버팔로에는 어거스틴의 카르타고와는 달리 한국 학생 12명이 있었는데 10명이 예수쟁이였다. 그들은 그에게 끈질기게 전도했다. 그는 그들의 전도와 아내의 임신을 통해 생명의 신비를 체험했다. 그 뒤 그는 예수를 영접하고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경영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 과정 2년차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소명을 받게 되었다. 그는 아무런 미련 없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방향을 바꿔 세상이 아닌 교회를 위해 목회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무엇보다 그는 어거스틴의 고백처럼 "그의 삶은 그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생활"을 살았다. 그는 귀국해 개신대학대학원 실천신학 교수로 재직하다 안식년을 맞았다. 그러다 2004년 5월 광주중앙교회의 청빙을 아무 연고 없이 받고 변한규 목사 뒤를 이어 후보자 가운데 제일 높은 점수(청빙위원 34명 중 31명 찬성)를 받아 부임하게 되었다. 당시 그의 청빙에 가장 앞장 선 사람은 김상술 장로였다. 그리고 그의 퇴장에 앞장 선 사람도 시계수리공 김상술이었다. 어거스틴이 반달족의 침입으로 하나님의 도성과 세상의 도성을 생각하고 “신국론”을 썼듯 채 목사는 시계수리공 김상술의 톱니에 걸리면서 지옥과 천국을 오갔다. 김상술은 총신대 재단이사 관계로 당회에서 치리를 당해 원로가 될 수 없게 됐다. 거기서 문제가 꼬였다. 부임하고 5년은 요셉이 예언한 풍년처럼 좋은 세월이었다. 그러나 6년 되는 해 2010년 1월 14일부터는 요셉이 예언한 흉년처럼 악한 세월이었다. 그 대략을 살펴보자. 좋은 세월 2006년 5월 8일부터 10일까지 2박 3일간 광주중앙교회(채규현 목사)에서 열린 제43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가 은혜의 분위기 속에 폐회됐다. 광주중앙교회 채규현 목사는 이번 목사장로기도회는 광주중앙교회가 호남지역은 물론 구 개혁교단의 '상징'이기 때문에 신경 써서 준비했다고 밝히고 모든 공을 장로님을 비롯한 전 성도들에게 돌리며 말했다. "우리 교회 나름대로 손님을 맞는다고 최선을 다했는데 불편한 점은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교회가 필요하다면 교단행사에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2006년 5월 8일 총신 운영이사회(이사장 김동권 목사)는 광주중앙교회에서 임원회와 이사회 전체회의를 잇달아 열었다. 그리고 현 재단이사 예종탁 목사(동현교회)가 오는 8월 정년퇴임할 경우 재단이사 결원이 발생하는 것에 대비 채규현 목사(광주중앙교회)를 재단이사로 미리 선임했다. 2007년 7월 16일 ~ 7월 24일 세례교인헌금(총누계: 20억 5454만 9122원)의 전국 최고 납부 4교회 중 광주중앙교회 2위를 차지했다.1. 충현교회(김성관) 50,000,000 2. 광주중앙교회(채규현) 12,185,0003. 대한교회(김삼봉) 9,000,000 4. 동광교회(김희태) 7,357,000 2009년 11월 28일 오전 10시 광주중앙교회는 장로 10명의 장립식을 비롯해 직원 131명의 임직식을 거행했다. 악한 세월 사실 교회 분쟁을 낳은 악한 세월의 씨앗은 2006년 5월 8일 열린 총신 운영이사회에서 재단이사 예종탁 목사(동현교회)가 그 해 8월 정년퇴임할 경우 재단이사 결원이 발생하는 것에 대비 채규현 목사(광주중앙교회)를 재단이사로 미리 선임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시계수리공 김상술이 총신과 총회를 상대로 시계 조립하듯 교회 돈을 가지고 비리를 조립했기 때문이다. 김상술은 채규현 목사가 총신 재단이사 선임 예정 빌미로 총신 발전기금 3000만원을 낸다고 교회에서 받아갔다. 그런데 그 돈 가운데 2000만원은 총신 공식 발전 기금이 아닌 운영자금으로 둔갑하고 나머지 1000만원은 행방을 감췄다. 그리고 그는 당회장 재정 결제 불가와 인사권 포기 등을 시작으로 채규현 목사를 10개 항목의 문서로 겁박하고 급기야 이단 시비까지 걸어 일사천리 전남제일노회의 목사 면직처리와 교회분쟁 사태로 몰고 갔다. 2010년 4월 22일 전남제일노회(노회장 김광현 목사)는 제110회 1차 임시회를 빛고을중앙교회에서 열고 광주중앙교회 채규현 목사를 면직처리했다는 재판국 보고를 받았다. 노회는 또한 광주중앙교회 임시당회장으로 광신대 총장인 정규남 목사를 파송하기로 했다. 2010년 5월 10일 전남제일노회(노회장 김광현 목사)는 제110회 2차 임시회를 담양 봉산교회에서 열고 성명서를 냈다. 광주중앙교회 사태와 관련해 전남제일노회의 재판을 불법으로 규정한 총회재판국에 헌법을 준수하고 법을 바르게 적용하고 채규현 목사와 관련된 예심판결에 대해서도 즉시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이어서 총회 재판국의 예심판결의 용어 사용이 잘못됐다고 신문에 글까지 올린 김상술 측 변호인 신현만은 자신의 책 “교회 재판 이렇게 하라”에서 예심판결의 필요성을 역설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총회재판국 양 측 심문 과정에서 재판국 임원 가운데 한 지혜로운 장로가 정작 예심판결의 필요성을 기록한 그의 책 페이지를 딱 짚어 들이대자 신현만은 김상술이 웃으며 건네는 꿀을 받아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2010년 5월 27일 헌의부(부장 노승욱 목사)는 총회회관회의실에서 실행위원회를 열고 전남제일노회 광주중앙교회 채규현 목사의 상소 건을 이미 재판국에서 예심판결을 내렸으면 확정판결이 날 때 까지 기다려야 한다며 상소장을 기각했다. 2010년 6월 29일 헌의부는 총회회관 소예배실에서 실행위원회를 열고 전남제일노회 광주중앙교회 채규현 목사가 제출한 ‘목사 면직에 대한 상소장’을 재심의했다. 그 결과 “상소장 서류에 문제가 없으면 재판국에 이첩하는 것이 헌의부의 임무다”, “재판국 구성 요건 및 절차 문제로 인해 이미 재판국에서 예심판결을 내렸기 때문에 상소 건은 취급할 이유가 없다”등의 의견이 맞서 투표를 진행, 찬성 11명, 반대 4명, 기권 4명으로 재판국에 이첩했다. 2010년 7월 16일 재판국(국장 김영길 목사)은 총회회관회의실에서 회의를 열고 광주중앙교회 채규현 목사의 상소 건을 다뤘다. 이 자리에서 상소인 채규현 목사는 전남제일노회의 재판국 구성은 불법이며 적법절차에 따라 노회 재판국에 소원장을 제출했는데 노회서기가 재판에 계류 중이기 때문에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특히 채 목사는 이단사상과 이신칭의를 부정했다는 질의에 대해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밝히고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가진 분이라고 전제하고 어렸을 적에 하나님을 몰랐다고 설교한 부분을 이단으로 정죄했다고 말했다. 이 표현이 오해를 주었다면 정중히 사과하겠다고 밝혔다. 2010년 7월 6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재단이사장 김영우 목사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총회 부총회장 김삼봉 목사에게는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각각 선고했다. 이관용 판사는 “피고인들이 재단이사로 재선임 되기 위한 목적으로 정관개정안 논의 과정에서 이사회 회의록을 변조한 죄가 인정된다”고 밝혔다. 이 선고가 다음 재판에서 뒤집히기는 했지만 이 이사회 회의록 변조 사건에는 채규현 목사 재단이사 선임이 다른 사람으로 바뀐 의혹도 묻혀 있었다. 2011년 2월 14일 광주중앙교회중재위원회(위원장 김준규 목사)는 총회회관회의실에서 회의를 열고 채규현 목사 측과 정규남 목사 측을 각각 불러 현 상황을 청취했다. 채규현 목사 측 관계자로 참석한 고인식·류성선 장로는 “성도들은 현재 채 목사를 중심으로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입장이다”라고 밝혔다. 정규남 목사 측 관계자로 참석한 김상술·고용태 장로는 “채 목사의 신학적 문제 해결 없이 조정은 무의미 하고 채 목사가 교회를 떠나고 교회를 나누는 방법이 바람직하다”고 설명했다. 광신대 총장이면서 광주중앙교회 불법 임시당회장이 된 정규남 목사는 채 목사와 웨스트민스터 동문임에도 “채 목사가 신학적으로 그릇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한 쉽게 받아들이기는 곤란하다”며 나름 학자로서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2011년 9월 30일 광주지방법원 제4민사부는 광주중앙교회 임시당회장 정규남 목사와 고용태 장로 등이 채규현 목사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피고는 광주중앙교회의 대표자로서 하는 일체의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또한 채 목사에 대해 정규남 목사가 광주중앙교회 임시당회장 직무를 수행하는 것을 방해하는 일체의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되며 광주중앙교회 구내에 당회장이나 담임목사로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출입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판결했다. 김상술은 기고만장했다. 그러나... 2013년 7월 10일 광주고등법원 제1민사부는 선고심에서 광주중앙교회 임시당회장 조경묵 목사 등이 채규현 목사의 교회출입금지 등을 청구한 항소를 각하하고 원고들의 청구를 모두 기각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전남제일노회 재판국의 채규현 목사에 대한 면직 결정은 효력이 상실되었다고 판단했다. 그 이유를 채 목사에 대한 면직을 무효화한 총회 재판국의 예심판결이 2010년 9월 30일 열린 총회 석상에서 ‘유효한 절차가 행하여지지 않은 채 그대로 종결’되면서 효력이 확정되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2013년 12월 26일 대법원 민사2부는 광주중앙교회 채규현 목사의 교회출입 금지 등을 취지로 한 2013다62018 사건에 대해 상고기각 결정을 내리고, 채규현 목사의 당회장 지위 회복을 인정한 광주고등법원의 판결을 확정했다. 2016년 4월 29일 광주지방법원 제11민사부는 원고 황윤수가 피고 채규현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원고 패소 주문을 하고 다음과 같은 판결을 했다. 이 사건 교회의 적법한 대표자는 피고(채규현)라 할 것이므로 황윤수를 대표자로 한 원고 교회 명의의 이 사건 소는 대표권 없는 자에 의하여 제기된 것으로서 부적법하다. 그렇다면 이 사건 소는 부적법하므로 각하하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2016년 10월 27일 채규현 목사의 일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한 장로가 이렇게 말했다. “총회가 채 목사를 떠나서 진정 교회와 교인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론은 총회가 해줄 수 있는 걸 못하고 구실을 못했다는 거예요. 상회비를 납부했고 세례교인 헌금을 전국 2등으로 총회에 냈어요. 채 목사에 대한 총회 결의도 있고 재판도 이겼어요. 채규현 목사가 광주중앙교회를 얼마나 매일 눈물로 기도했고 그 사모가 눈물로 기도하고 여기까지 지켜왔어요.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못했을 겁니다. 채규현 목사님이나 사모님을 보면 정말로 진실한 교역자구나 하는 걸 알 수가 있어요. 채규현 목사의 핵심이 무엇이냐 하면 성추문이나 어떤 문제도 없고 그만큼 깨끗하고 신학적 학식도 높은 분이라는 겁니다. 내가 정말 사람 잘 봤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채 목사님 곁을 7년 동안 왜 떠나지 못하고 맴도느냐고 이야기들을 합니다. 제가 채 목사님한테 이야기했어요. 목사님 내가 하나님 곁으로 가면 내가 삼 일 동안 외롭지 않고 내 가족이 삼 일 동안 쓸쓸하지 않도록 내 빈소를 지켜주실 것을 약속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이걸 말했어요. 아무 것도 없어요. 나와 함께한 목사님하고 교인들 장로님들이 있지만 채규현 목사님이 끝까지 저를 지켜줄 수 있겠습니까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약속했습니다. 이걸로 다예요. 나한테는 이게 전부였는데 총회에서는 그 고난과 역경과 이 아픔을 누가 보상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나는 그걸 물어보고 싶어요. 이 분에 대한 보상은 누가 해요. 제일 무서운 게 이거거든요. 총회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은 누구냐. 첫째는 광주중앙교회고 둘째는 채 목사 사모예요. 왜냐하면 목사는 당사자이지만 사모님은 얼마나 눈물로 기도하고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모든 그 사업 그 선교원 교육관을 불법으로 차지하고 내주지 않고 버티며 소송하고 대항하니 이 무서운 죄를 누가 다 져야 합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오래 참으셨습니다. 지금까지 지켜주셨습니다. 하나님 두려워하고 살아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목사님 건강하고 참 바르시죠. 진즉 끝날 것인데 대법 판결 난 지 3년 됐고 제99회 총회 때 각하됐으니 그때 끝났어야 해요. 끝난 것인데 또 손대면 안 돼요. 손대면 이건 불법이에요. 일사부재리에 의해 또 하면 안 돼요. 한 사람이라도 억울한 일이 있으면 안 되고 총회가 판결했으면 시행하면 돼요.” 채규현 목사가 말을 이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내 편이 아닙니다. 저쪽 이쪽 갈라진 편이 아니고 그냥 교회에서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장로님들도 확인 위원을 했잖아요. 거기서 뭐가 하나라도 나왔으면 (신앙적으로) 내 편에 설 사람은 없어요. 자기네들이 다 확인했어요. 재정이고 뭐고 다 무혐의가 되니까 마지막에는 이단까지 들고 나온 겁니다. 사실은 이단이 제일 쉬운 건입니다. 나는 그렇게 표현 안했다 하면 끝나는 겁니다. 이미 다 끝난 이야기인데 그것밖에 없는데 이번 제101회 총회 때도 뒤집으려고 별 짓을 다했죠. 그런데 다 끝나고 나니까 지금까지 아무 이야기도 없습니다.” 2년 동안 당회장 채 목사에게서 결재권을 빼앗기 위하여 시계수리공 김상술은 나름대로 완벽하게 준비했다. 그리고 2010년 1월 14일 다른 장로와 함께 그를 찾아 왔다. 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그의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10가지를 내밀며 당회장의 재정결재권과 인사권을 포기하지 않으면 목회를 못하도록 교회에서 내 보내겠다며 겁박했다. 그때 그는 단호히 거부했다. 그 뒤 채규현 목사가 지금까지 고소당한 것이 형사와 민사 합쳐서 47건이다. 심지어 어떤 한 건은 10가지 문제로 고발했기에 10건의 고발 건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약 60건이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이 중에 3분의 1 정도가 형사 고발 건인데 채 목사가 고발당해 기소된 적이 한 건도 없이 다 무혐의 처분을 받고 모든 민사소송은 다 이겼다. 2010년 1월 14일에 광주중앙교회는 분쟁이 시작됐으니 약 7년여 가까운 세월동안 고통을 겪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와중에 교회 노회 총회와 연관되어 일어난 일은 참으로 많다. 김상술 정규남 김삼봉 서기행 권재호 이승희 등으로 이어지는 일은 조직폭력배부터 최순실까지 이어져 온 나라를 격랑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최순실 게이트'와 닮은 점이 있다. 이 최순실 게이트처럼 김상술 정규남 김삼봉 서기행 권재호 이승희 등에 대한 검찰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광주중앙교회 게이트로 비화할까 아니면 김상술 게이트로 번질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사건이 종결되면 ‘히포의 어거스틴’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리스도를 위한 헌신적인 목회자와 위대한 학자가 되었듯 채규현 목사도 ‘광주의 어거스틴’이 되어 우리 교단과 교계를 위한 헌신적인 목회자가 되고 위대한 목회 저술을 남기리라 믿는다. 2016-11-26
    • G.PEOPLE
    • G.PEOPLE
    2016-11-29
  • 다윗의 별 전계헌 목사
    9월 26일 101회 총회 오후 8시 30분 부총회장 입후보자 정용환 김영우 목사 총회 현장에서 후보자격 상실 9월 27일 오전 11시 20분 전계헌 목사 총 투표수 1294표 중 757표 득표 534표의 나학수 목사 눌러 제101회 부총회장 당선 다윗처럼 제101회 부총회장 된 전계헌 목사 제102회 총회에서 우리 총회를 지키고 하나님의 영광 드러내는 다윗의 별이 되기를 옛날 총신엔 성경 하나 나 하나 신약 구약 언약 둘 교육전도사들 있었다. 지금은 총회 하나 나 하나 성경 총회헌법 둘 목사들이 있을 뿐이다. 정신도 육체도 돈을 향해 있고 우리들의 피는 위대한 칼빈주의를 위한 빈 칼이 되고 있다. 최근의 밤하늘을 보라.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말하지 않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을 별들은 자기들의 빛으로 가슴 깊이 감싸 주고 있다. 실제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우리들을 향하여 시내산의 영광 같은 모세의 얼굴빛을 가림 없이 던지고 있다. 근대 이전까지 별은 낭만과 이상(理想)의 상징이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노래하고 스물여덟 살에 생을 마감하고 북간도 용정 교인묘역에 시인 윤동주는 묻혔다. 시인이기도 한 유쾌한 목사 소강석은 한 점 부끄럼이 없이 시인 윤동주를 사랑한다. 그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시인 윤동주의 묘역이 초라한 것에 부끄러워 그 바쁜 틈을 내 제101회 총회 한 주 전에 직접 중국 북간도로 찾아가 그 묘역을 새로 단장했다. 그래서 윤동주는 그의 시 “별을 헤는 밤”에서 생전에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라고 붉은 눈시울로 노래했던 모양이다. 오늘밤에도 별에 바람이 스치우는 게 괴로워 별을 헤던 윤동주와 달리 우리는 별 밝은 밤에 돈을 센다. 이 지독한 물화(物化)의 터널을 관통하면서 우리들의 믿음은 복을 구걸하는 미신으로 변했다.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지 않는 우리를 대신해 별이 아픈 자들을 껴안는다. 별이 ‘너 무엇하고 있느냐’고 물을 때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고 응답하면 우리의 마음에 다윗의 별이 탄생할 것이다. 다윗의 별은 헥사그램이라고 하는 삼각형 두개를 엇갈리게 그려놓은 별모양이다. 이것은 ‘다윗 왕의 방패’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국기에 새겨진 다윗의 별은 하나님의 백성과 그 믿음을 지키는 상징이다. 소강석 목사가 사랑하는 윤동주의 고백처럼 별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 가을로 가득 차 있다. 9월 26일 101회 총회 첫째 날 그 밤 8시 30분 충현교회 총회 현장에서 부총회장 입후보자인 정용환 목사와 김영우 목사 모두 총회 현장에서 후보자격을 잃었다. 9시 40분 목사부총회장에 대해서는 후보자 유고시 해당 지역 총회실행위 소집해 후보 추천 받아 선거 진행 한다는 선거규정에 따라 중부호남지역 실행위원들이 모여 제3의 후보를 추천했다. 실행위원들은 총 57명으로 추천 후보수 제한이 없다. 10시 20분 목사부총회장 후보로 나학수 목사(빛고을노회 광주겨자씨교회)와 전계헌 목사(이리노회 동산교회)가 추천됐다. 제100회 호남중부권역 총회실행위원들은 자체 선거를 통해 두 사람을 최종 목사부총회장 후보로 추천했다. 두 사람에 대한 선거는 시간 관계상 다음 날 치르기로 했다. 9월 27일 오전 11시 20분 전계헌 목사가 목사부총회장에 당선됐다. 전계현 목사는 총 투표수 1294표 중 757표를 득표하여 534표를 얻은 나학수 목사를 누르고 제101회 목사부총회장에 당선됐다. 뜻하지 않게 제101회 목사 부총회장에 당선된 전계헌 목사는 9월 내내 동산교회에서 다윗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데 다윗도 전라북도 익산의 전계헌 목사처럼 뜻하지 않게 이스라엘 왕이 될 기름부음을 받았다. 성경은 사무엘상 16:1-13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니라.” 사무엘이 말했다.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찌니라.”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여 베들레헴에 이르매 성읍 장로들이 떨며 그를 영접하여 말했다.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평강을 위함이니라. 내가 여호와께 제사하러 왔으니 스스로 성결케 하고 와서 나와 함께 제사하자.” 그리고 이새와 그 아들들을 성결케 하고 제사에 청했다.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하였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이새가 그 아들 일곱으로 다 사무엘 앞을 지나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이에 보내어 다윗을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다웠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었다. 다윗은 혈색이 좋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다웠다(삼상 16:12). 아버지의 명령으로 양을 지키고 있을 때 덤벼드는 사자나 곰을 쳐 죽여 임무에 대한 충실성과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삼상 17:34-36). 음악적 소질이 비상하여 이 무렵 수금을 잘 탄다는 것이 알려졌고 후에는 시도 많이 쓸 정도로 예술적 재능도 있었다. 이것은 다윗의 인생에 있어서 제 1의 전기(轉機)이며,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크게 임하셨다. 그러나 그는 일상 자기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제101회 부총회장으로 선택받은 전계헌 목사는 여러 면에서 다윗을 닮았다. 10월 9일 익산 동산동에 있는 동산교회에서 수요예배를 마치고 당회장실에서 전계헌 목사를 만났다. -어떻게 신학을 하시게 되셨습니까. “군산 개복교회 담임하셨던 김종석 목사님이 총신 대학원 다니시고 야간에 숭실대 사회복지과를 다니셨어요. 군목으로 제대하신 뒤였죠. 그때 이영주 사모님이 초등학교 교사이신데 저희 고향 전라북도 완주군 경천면 소재 가천초등학교 근무를 하셨어요. 그 학교에 저희 큰 형님이 같이 근무를 하셨어요. 형님은 정말 전형적인 인격을 갖추신 교육자이셨어요. 그래서 이영주 사모님이 형님과 같은 학교 근무를 하시다 보니까 저희 형님을 보시고 저를 잘 아시지도 못하면서 이런 분 동생이면 목사님 한 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신 겁니다. 제가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부터 만나기 시작해서 졸업하자마자 저한테 신학을 하라고 자꾸 권하시는 거예요. 저는 신학을 한다는 건 상상도 못했어요. 목사라면 하늘에 닿는 분이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막연하게나마 고등학교 시절 전주에서 이어령 교수나 김형석 교수 강연만 있으면 가방 들고 찾아가 참석을 하는 겁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김종필 씨가 공화당 당의장일 때 전주 삼남극장에서 강연을 하는데 고등학교 때 교복입고 가방 들고 무엇 때문에 거길 참석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때 교훈 한 가지를 배웠어요. 뭐라고 했느냐면 그 걸쭉한 목소리로 ‘정치란 됫박 속에 있는 된장을 둥근 바가지로 푸는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무슨 말인 줄 몰랐는데 나중에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서 정치라는 게 당회 정치가 됐건 노회 정치가 됐건 하면서 겪어보니 그 생각이 많이 나요. 됫박 속에 있는 된장을 바가지로 푸면 된장이 됫박에 좀 남잖아요. 뭐든 완벽하게 청소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의미 같아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김종석 목사님하고 이영주 사모님 때문에 신학을 하게 된 셈이죠. 어떻게 보면 처음에는 권유를 받고 목사 된다는 건 아이쿠 상상도 못하죠. 그때는 목사님이 하늘에 닿는 분인 줄 알았어요. 그리고 전주 동부교회 김지선 목사님한테 학습 세례 받았는데 고등학교 때도 신앙생활 열심히 잘 했어요. 학생회 활동도 하고 잘 했는데.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에 그분들 만나 자연스럽게 신학으로 연결이 된 겁니다.” -고등학교는 어디 나오셨어요. “전주 신일고등학교요. 때마침 미션스쿨이었어요. 지내놓고 보니까 이래저래 제가 신학을 하게끔 연결이 되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신학을 하게 되었고 목사 교역자 생활은 광주 군산 익산 세 군데에서 했어요.” -그럼 군산에서 교역자 생활하신 게 두 번째입니까. “군산 그렇죠. 두 번째 교역자 생활한 곳입니다.” -거기 계시다 담임으로 익산에 오신 겁니까. “군산 개복교회 갈 때 80년 1월 14일 강도사로 갔다가 거기서 목사 되고 딱 4년 있다 83년도 12월 28일 여기 동산왔습니다. 그때 와서 34년째 있어요.” -지금 이 건물은 목사님 때 지으신 겁니까. “제가 와서 건축을 했죠. 옛날에는 교회가 하도 어려우니까 교역자가 한 달 있다가 온다 간다 말도 없이 갈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위임목사는 1대가 백남주 목사 6년 계시다 나주 제일교회로 가셨다가 광주 서현교회로 가셔서 개혁 측 총회장도 하셨습니다. 2대는 11년 계시다 미국으로 가셨어요. 제가 3대 34년 재직하고 있는 거예요. 너무나 오래 있네. 하하.” -목회 신념이 있으시다면. ”제가 신학교 다닐 때 몇 년도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어요. 추석 명절에 어디들 가는데 나는 기도원에를 갔습니다. 그때 세 가지 기도제목을 정하고 기도를 했어요. 그게 평생 기도제묵이 될 줄 몰랐습니다. 말씀의 능력 기도의 능력 성령의 충만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그게 평생 기도제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이것저것 시도해보다가 여기 와서 굳어진 표어가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동산교회’입니다. 목사가 원하는 교회도 아니고 교인이나 장로가 원하는 교회도 아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동산교회입니다. 이것과 더불어 ‘죽어도 예배’ ‘굶어도 십일조’ ‘쓰러져도 새벽기도’ ‘힘들어도 복음전도’ 이것들을 평생 교회 푯대로 삼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이 표어들을 시작하셨습니까. “햇수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여기 다녀간 분들이 좋다고 채용한 분들이 많아요. 그 중에 목포 백동조 목사님은 부흥회 가는 데마다 전해 아주 그분 것이 되었고 광주 백남선 목사도 세 가지 ‘죽어도 예배’ ‘굶어도 십일조’ ‘쓰러져도 새벽기도’ 딱 써서 액자로 걸어놨더군요.” -목사님이 원조시군요. “그런 셈이죠. 전북기독신문이 있어요. 2년 동안 칼럼을 썼는데 거기에서도 언급을 했고 방송에서도 한번 밝혔죠. 원조라면 원조죠. 백남선 목사도 친구다 보니까 취향이 같을 수 있죠.” -인생에서 어려운 적이 있으셨습니까. “74년 2월 7일 오후 8시 광주 적십자병원 옆 삼거리가 있어요. 친구하고 지나가다 우측으로 커브를 도는데 어떤 차가 나를 쳐서 넘어졌어요. 그런데 나는 어느 상가 윈도우에 박혀버렸습니다. 충격을 받으면서 순간 정신을 잃었어요. 전혀 기억을 못해요. 나중에 병원에서 보니까 삼손처럼 두 손을 침대에 묶어놨어요. 나는 아파서 몸부림을 하고. 나중에 얘기 들어보니까 친구가 업고 적십자병원에 갔는데 없어요. 원장도 없는데 왔다 갔다 하다 길에서 원장을 만났대요. 원장이 군의관 출신인데 군대에서 환자가 교통사고로 오면 충격으로 왼쪽 가슴 아래 있는 비장이 터져 죽는 경우가 많았던 모양이에요. 그분이 그 생각을 해서 가운도 안 입고 사람들이 다 보는데서 수술을 한 겁니다. 배를 활짝 열고 보니 비장이 터져 피가 응고되어 있어 비장을 적출하고 내장을 소독약으로 다 소독했다는 겁니다. 좀 안정이 된 뒤에 다리도 수술했어요. 우리 큰형님이 내 수술비 대느라 참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그때가 몇 살이셨습니까. “스물여덟 살이었죠.” -결혼은 언제 하셨습니까. “스물아홉 살. 결혼 사고 난 그 해 74년 12월 그 사람을 만났어요. 허허. 우리 장인이 박현국 목사님이시고 처남이 박효배 목사님입니다. 당시 어른들은 신학생이 고생 많이 한다는 것 다 알잖아요. 결혼은 안 시키고 싶은 대상이고 본인도 그럴 생각은 도무지 없었어요. 그때 당시 내 모습이 내가 생각해도 교통사고 나서 1년도 안됐지 광주에서 가난한 신학생 졸업반이지 얼마나 볼만 했겠어요. 그런데다 너무 어려워서 1년 쉬기까지 했어요. 그런 뒤 총신을 갔죠. 허허. 그런데도 1년 후 결혼이 됐어요. 74년도 교통사고 75년도 결혼 78년도 총신 71회 졸업. 하하.” -후유증은 없으셨어요. “감사하게도 운동도 하고 건강해요. 정말 감사하죠. 다 그러잖아요. 살다보면 한 번씩 얻어터지고 정신 차리는 것처럼 교통사고가 나를 목사로 만든 겁니다. 신학교는 갔지만 목사가 되기까지 교통사고가 나를 만들었어요. 결혼할 때도 사람이 염치가 있지 뭐라도 하면서 결혼을 해야 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내가 아내한테 말했어요. ‘일생을 살면서 돈이 있든 없든 행복한 사람 별로 없는데 어차피 결혼해 사는데 평생 복음 전하고 살면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그 말이 좋게 들렸는지 부모님 처남 다섯 처제 한 명 모두 우리 결혼에 반대했어요. 그런데 본인만 결혼한다고 하는데도 본인이 한다니까 결혼이 되더군요. 껄껄. 결혼할 때 우리 집이 전혀 안 믿는 가정이었어요. 큰형님이 총각 집사도 하시고 했는데 나중에 안 다녔어요. 그런 환경이다 보니 나는 신앙적으로 외롭잖아요. 결혼 조건이 무엇보다 믿는 가정이어야 할 것. 둘째 본인이 믿어야 할 것. 그것만 충족되면 되는 거였어요. 결혼도 엄청난 하나님 은혜였는데 정말 믿음만 가진 저를 하나님이 우리 교단의 총회장으로 삼아주셨어요. 총회 다녀와서 처음 새벽기도하며 하나님께 말씀드렸어요. ‘하나님 일 핑계대지 않고 할 수 있는 대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총회 일을 맡겨 주셨으니 제가 할 수 있는 한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다짐을 했습니다.” -붙잡고 사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시편 23편 1절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도다. 살면서 그것밖에 할 말이 없더군요. 내가 잘 나서 목회하고 내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제까지 살 수 있었던 거죠. 형제들 중에 목사가 된다면 형님이 되던 동생이 되던 했어야 하는데 제일 모자란 제가 됐어요. 옛날에 내 이름이 무슨 뜻인 줄 몰랐어요. 계수나무 계(桂) 법 헌(憲) 뭔가 그런가 보다 했는데 나중 목사 되고 가만 생각하니까 ‘하늘의 법’으로 살아라 하는 뜻이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사모님과 평생 같이 사랑으로 사신 비결은 무엇입니까. “저는 아내와 모든 걸 같이 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입니다. 운동을 해도 같이 하고 테니스도 같이 배워 같이 치고 탁구도 같이 배워 같이 쳤어요. 다 처음 배운 겁니다. 나중에 테니스도 잘 하고 탁구는 저보다 더 잘 해요. 저희 노회 대표 선수로 나갑니다. 부부 간에 취미가 달라 따로 놀면 안 되잖아요. 우린 연속극은 별로 안 보고 부담 없이 보고 웃는 개그 프로를 같이 봐요. 런닝맨 개그콘서트 같은 것(좋아하는 음식을 대하는 것처럼 만면에 웃음이 가득해진다) 둘이 같이 보고 웃고 그래요. 우리 애들도 같이 보고 웃어요. 나는 공부를 하든 뭐를 하든 교회에서 합니다. 그게 제 생활 원칙입니다. 저는 집에 들어가면 아주 자유인으로 돌아가 편하게 지냅니다. 아내나 아이들도 다 알아요. 집은 휴식하는 곳이라 책을 가지고 들어가지 않습니다. 허물과 격의 없이 가족들과 지냅니다. 아내도 편안하게 해 주려고 (빨래나 설거지도 거든다고 사모님이 말을 거들었다) 노력합니다.” -사모님은 목사님의 어떤 점이 좋으세요. “목사님은 유머스러워요. 그게 좋아요. 노회 행사 때 사모님들도 목사님이 같이 가시면 재미있다고 아주 좋아해요.” 전계헌 목사의 제101회 총회 부총회장 취임을 기념하는 감사예배가 10월 6일 익산 동산교회에서 열렸다. 이리노회 제67회 정기회 순서로 마련된 이날 노회원들과 조배숙 국회의원, 총회서기 서현수 목사 호남협의회장 윤희원 목사 전북교회협의회장 이리노회 1번 손범성 목사(전계헌 목사 2번) 등 하객들이 참석해 전계헌 목사의 당선을 축하했다. 이날 전계헌 목사의 두 아들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 전계헌 목사는 말했다. “사람이 헤아리기 어려운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로 뜻밖에 제101회 부총회장 당선의 영예를 누리게 됐습니다. 모든 동역자들과 함께 직책을 감당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거룩성 회복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이리노회(노회장 정창호 목사)에서는 전계헌 목사에게 기념패를 전달하며 제102회 총회를 준비하는데도 만전을 기할 것을 다짐했다. 다윗처럼 부총회장이 된 전계헌 목사가 제102회 총회에서 우리 총회를 지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다윗의 별이 되기를 소망한다. 2016-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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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28
  • 총회 뉴 스파크 권순웅 목사
    제101회 총회 뉴 스파크 새 불꽃 총회 부서기 권순웅 목사 3R 공약 첫 번째 R Reformation! 개혁 절대 이권에 개입하지 않고 청탁을 받지 않겠다 두 번째 R Rebuild 재건축 총회를 다시 세우는 일에 최선 노회와 교회가 잘 되게 섬겨 세 번째 R Respect 존중 품격을 세우는 총회 되도록 최선을 다해 섬기겠다 1517년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했던 비텐베르크 시는 마르틴 루터 시로 개명된 지 오래다. 오늘날 독일 전 국민의 98%가 루터교인이다. 하나님이 함께한 종교개혁자 한 사람의 영향은 시대를 초월한다. 독일 학교의 방학은 모두 기독교와 연관되어 있다. 매년 10월1일부터 두 주간은 추수감사절 방학이고 추수감사절과 성탄절, 부활절에도 각각 두 주간 방학을 한다. 모든 국민은 교회를 위해 종교세를 낸다. 목사는 정부 공무원이며 모든 아이는 유아세례를 받고 13세가 되면 1년간 매주 두 시간씩 100시간 이상 성경을 배워서 14세가 되면 입교식을 한다. 이 날은 부모님과 일가친척이 다 모여 축하잔치를 연다. 독일은 결국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통일을 이루었다. 한 사람의 영향이 새 역사를 만든다. 9월 26일 오후 10시 20분 총회임원 선거로는 유일하게 정상적인 경선이 이루어진 부서기 선거에서 권순웅 목사(평서노회 주다산교회)가 총 1369표 중 808표를 얻어, 558표에 그친 김상현 목사(수도노회 목장교회)를 제치고 부서기에 당선됐다. 능금이 그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지는 이 가을에 권순웅 목사는 제101회 총회 New Spark 새 불꽃이다. 불꽃은 연소(燃燒) 반응 시 빛나는 밝은 바깥 부분이거나 타는 불에서 일어나는 붉은빛을 띤 기운이다. 그는 경기도 화성시 반송동 160에 2014년 4월 19일 종교부지 2000평 건평 2500평 2500석의 예배당을 최대 저렴하게 최고의 기능을 지향해 세워 2500명 성도를 목회하는 주다산교회의 담임목사다. 세계선교회 전 이사장 김재호 목사는 온갖 비리로 몸살을 앓던 GMS를 바르게 세우고 성장시켰다.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총회 정치 현장에 3R을 외치며 불꽃처럼 총회 제101회 부서기로 등장한 같은 평서노회의 권순웅 목사에 대해 말했다. “송파구 오금동에서 오금을 못 펴다 동탄 신도시에서 오금을 펴 2500여명의 주다산교회를 목회하는 열정적인 목회자입니다.” 실제로 오금동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갈 때 백토고개에서 잠시 쉬었다가 신하에게 무릎 안쪽의 ‘오금이 저린다’고 말하여 그 후 ‘오금골’이라 불리어 졌다는 설이 있는 지역이다. 1992년 송파구 오금동 30평 상가 교회에서 10여년 목회하다 2001년 8월 천신만고 끝에 동탄 신도시에 땅 640평 매입하고 천막교회를 시작했다. 선교활동에 열심이던 그가 목회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다. 그것은 전 총신대 김의환 총장이 “권 목사 외부 활동을 하는 은사가 있는데 목회를 해라” 하는 권면을 따른 것이었다. 그는 영남대 경제과 재학시절 이념서클을 이끌었던 운동권 출신으로 대기업 마케팅 업무를 보다가 회심했다. 그 후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이 땅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신앙공동체를 만들겠다고 결심하고 1989년 총신대 신대원에 들어갔다. 그는 보기와 달리 1955년생이라 총신 78회 정도 되어야 하는데 84회다. 총신대 신대원에 진학한 그는 학교 뒷동산에서 기도하던 중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SPARK(성령의 불씨) 운동’을 목회비전으로 세웠다. SPARK의 S는 scrioture 성경이고 P는 prayer 기도고 A는 action 삶이고 R은 reformation 개혁이고 K는 korea 한국이다. 민족의 개혁운동은 성경과 기도와 삶으로 바꿔야 한다. 스파크는 성령의 불이다. 제101회 총회에 뉴 스파크 새 불꽃으로 등장한 총회 부서기 권순웅 목사가 앞으로 지켜야 할 공약 3R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R은 Reformation! 개혁입니다. 우리 개혁주의 신학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되 개혁주의 적용은 프로테스탄트입니다. 절대 이권에 개입하지 않겠습니다. 청탁을 받지 않겠습니다. 깨끗하게 하겠습니다. 이것이 개혁의 첫걸음입니다. 두 번째 R은 Rebuild입니다. 총회를 다시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총회가 생산자 지향주의의 지도적 리더십을 가질 것이 아니라 소비자적 섬김의 지도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회가 잘 되고 교회가 잘 될 수 있도록 섬겨야 합니다. 세 번째 R은 Respect입니다. 존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품격을 세우는 총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 섬기겠습니다.” 한 사람의 영향이 새 역사를 만든다. 제101회 총회 새 불꽃 권순웅 목사가 그의 3R 공약대로 개혁주의 장자 교단 총회의 새 역사를 쓰기를 바란다. 2016-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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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28
  • 지혜자의 마음 이건영 목사
    이건영 목사 이전이나 이후에도 위대한 설교자나 목회자는 많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을 깨우치고 실천하는 지혜자의 마음을 지닌 이건영 목사에게 목회 성공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에게 목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알리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화장터에 가서 뼈 몇 줌으로 바뀌어 나온 어머니를 상수리나무 아래 뿌리던 일은 크나큰 슬픔이다. 전도국장 시절 원자력병원에 가서 환자복 입고 곧 나을 것이라며 다짐하는 독일 병정 허봉춘 목사를 보던 기억은 기나긴 슬픔이다. 내 삶의 원천이며 원동력인 슬픔은 남의 슬픔을 이해하기 위해 고개 숙이고 몸 더욱 낮추어 눈물을 삼키게 한다. 미워할 수 없는 사랑은 나를 끊임없이 구속했으나 사랑할 수 없는 미움은 이날 이때껏 나를 키웠다. 그리고 대상을 알 수 없는 막막한 슬픔이 나를 일으켜 세우곤 했다. 어금니 꽉 깨물고 응시하리. 목사로서 오늘이 있게 한 선지동산 총신과 목사인 우리를 두른 거룩한 총회를. 2016년 1월 8일(금) 3월 6일(주일) 두 차례 이건영 목사(총신 75회)를 인천시 중구 인중로에 있는 인천제2교회 당회장실에서 만나 대담을 했다. -선교나 전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우리도 보편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는 이제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사회복지 정도로 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사회복지가 상당히 많은 효과를 거두는 모양이던데요. “그러니까 효과가 이제 갑자기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들이 장애우들을 평일에 교회로 초청을 합니다. 교육관에서 하고 있습니다. 장애우 사역을 하다보면 말을 못하는 사람이 아버지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게 사오 년 걸립니다. 금방 효과가 나타나는 건 아닙니다. 꾸준히 하고 있기는 합니다.” -어떻게 그런 사역을 생각하시게 되었습니까. “이제 인천제2교회 1대 이승길 목사님은 전쟁 직후 남편 없고 모자들만 불쌍하게 사는 사람들을 교회 안에서 돌보는 마르다 모자원을 운영하셨습니다.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물품이나 식품을 가지고 불쌍한 모자들을 돌보셨는데 그것이 우리 교회 사회복지의 시작입니다. 그 다음은 우리 교회 2대 이삼성 목사님 그분은 우리 교회 내에 그 당시(70년대) 드물던 교회에 삼일유치원을 열었습니다. 우리 이 지역에서는 사립 유치원으로 꽤 유명한 유치원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유치원이니 유아원 선교원이 많지만 말입니다. 그 당시는 거의 없다시피 했죠. 그런 사회복지를 이삼성 원로목사님이 하셨죠. 그 정신을 물려받은 것입니다. 몇 가지 사역을 교육관을 중심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사회복지 사역에 우리 교인들 마음이 많이 열려 있고 헌금도 많이 합니다. 그 종류가 열 몇 가지가 됩니다. 지역사회를 어떻게 보셨는지 모르지만 이 지역은 재개발 지역입니다.” (인천제2교회는 숭의로터리를 중심으로 주변에 공구업체와 인천중앙여자상업고, 인천시립도원체육관이 있다. 인천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장로교회라는 뜻에서 ‘인천제2교회’란 이름으로 1948년 세워진 교회는 68년이 됐다. 도시화와 산업화가 가속화되면서 인천 주변 지역은 숨 가쁘게 변했다. 많은 이들이 주변 신도시로 떠났고, 관련 기관과 시설도 자리를 옮겼다. 교회가 있던 지역은 점점 문화 혜택에서 소외된 지역으로 남았다. 그래서 2010년 새 예배당을 건축하며 지역사회를 향한 사역의 지향점을 더 분명히 했다. 주 중에도 주민에게 열린 교회, 지역과 함께 호흡하는 교회를 지향한 것이다. 과감하게 4000석 규모의 예배당을 1700석으로 줄였다. 그 대신 주민들을 위한 다양한 공간을 확보했다. 완공된 예배당에선 어린이 도서관, 장애인을 위한 특수교육센터, 노숙인과 어르신을 위한 목욕탕,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치과와 미용실, 헬스장 등에서 21가지 사역이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공장 가게들 공구 상가들이 많더군요. “공구 상가 음식점들이 많죠. 사실 이 지역은 인천에서 아주 낙후된 지역입니다. 그래서 사회복지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눈을 뜨게 된 겁니다. 저희 교회가 송도 신도시라든지 영종 신도시에 있다 하면 사회복지가 필요 없죠. 재개발지역이라 사회복지가 필요합니다.” -지금 이 교회 오신 지 몇 년 되셨어요. “저는 여기에서 태어났어요. 이 교회 유아세례 출신입니다.” -아버님이 장로님이셨나 보죠. “장로님이셨죠. 돌아가셨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이준경 장로님이라고 옛날에 경기도 제5대 교육감(1980. 2. 11. ~ 1983. 2. 27)을 하셨죠. 한명수 목사님 계실 그 때 경기도 교육감을 하셨습니다. 그 이후 교회가 점점 성장을 했어요. 저는 27살까지 여기 교인으로 있었죠. 그러다 소명을 받아 총신 신대원가서 서울서 칠팔 년 부교역자 생활을 했습니다.” -서울 어디서 하셨습니까. “혜성교회 박광옥 목사님 밑에 있었고 장충체육관 앞 장충교회 이규일 목사님 밑에도 있었죠. 거기서 부목사로 있다가 여기 이삼성 목사님이 내려오라고 해서 오게 됐습니다. 그 당시야 목사님 말씀하시면 하나님 하시는 걸로 알았죠. 장충교회에서 여기 본교회로 오라고 하니까 그냥 온 겁니다. 어르신 말씀이니까. 그때 와서 부목사(부임 1987. 6. 28) 6년 그리고 담임목사 23년(위임 1993. 12. 9) 넘어가네요. 그러니까 거의 30년 됐네요. 제가 52년 2월 14일 생이거든요. 제가 64세죠. 64세 가운데 이 교회에서 교인으로 27년 목회자로 30년 그러니 57년을 여기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는 뭐 권위도 없어요. 여기는 다 동기들 선배 스승 같으신 어른들인데 어느 날 건영이가 목사로 온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키워주신 어르신이 오시라고 해서 왔지만 몇 년 있다 서울로 도로 올라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한 2년 지나니까 초청해 주신 이삼성 목사님(1992. 9. 22 제77회 총회장 취임)이 저한테 후임자가 돼주면 좋겠다고 하신 겁니다. 그리고 저를 유학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삼성 목사님이 대단하시네요. “유학 다녀온 다음에 본인이 만 70세에 은퇴하시겠다고 하더니 정말 그러셨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역하고 있는 거죠.” -그 때가 언제죠. “그러니까 그게 87년입니다. 장충교회에서 87년에 왔습니다. 한참 민주화 운동할 때죠. 설마 제가 이렇게 오래 있을 줄 몰랐어요. 있을 수가 없는 건데 교인들이 좋아서 있을 수 있었죠. 시골 교회처럼 순수해요.” -이삼성 목사님이 언제 돌아가셨죠. “한 7년 넘었죠. 제가 여기 재직한 것도 부목사 6년 담임목사 23년 29년이네요. 정말 꿈만 같네요.” (그는 파안대소했다.) -총신은 몇 회세요. “75회입니다. 지금은 제 마음속에 하나님 은혜 주시면 이 교회에서 은퇴하자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러시면 지금 또 어디로 부임해 가시겠다는 겁니까. “저는 좀 일찍 은퇴를 해 힘이 있을 때 다른 사역을 좀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장로님들이나 교인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을 접었습니다.” -제가 보니 한 교회에서 지도력을 키우신 목사는 영적 지도자라 연륜이 더할수록 더 지도력이 성숙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지도력을 다른 데 쓰는 건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지만 인천에는 신도시가 많이 생겼습니다. 여기 교회 근처에서 걸어 교회 나오는 교인은 5퍼센트도 안 됩니다. 나머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먼 데서 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교회가 어느 정도 복음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지역에서 오시는 분들을 위한 것입니다. 여기는 청계천처럼 공구상가가 많습니다. 500개가 넘어요. 저 구석구석까지 성탄절 날 수건을 돌리면 500개가 부족해요. 장사하는 사람들은 그 자리를 죽어도 안 옮기려고 해요. 이미 다 자리가 잡혔으니까요. 저희 교회는 공구상가와 주위 식당들과 같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제임스 보이스가 30년간을 담임목사로 섬긴 필라델피아 제10장로교회는 장장 현재는 190년을 개혁주의 청교도 신앙을 전수하고 있는 뿌리 깊은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필라델피아의 명동이라는 월넛 스트리트에 있습니다. 제임스 보이스는 선교를 위해 교회가 그 지역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여기가 중구니까 옛날에는 인천의 번화가였죠. 제 어렸을 때 추억이 다 있습니다. 학교도 가고 병원도 가고 음식점도 많았습니다. 지금은 그런 것들이 다 신도시로 나갔습니다.” -교회로서는 딱 좋은 환경이네요. 교회가 땅값이 오르면 문제가 생기더군요. “교회가 땅 사기는 좋습니다. 평당 600이면 삽니다. 다른 지역은 굉장히 비싸지요. 그런데 파는 데는 600밖에 안 하니까요. 내놓으면 팔리는 건 공구상가입니다. 그러나 안 팔려고 하지요.” -시카고의 무디 바이블 교회도 시내에 있는데 목회자에 따라 교회로 사람들이 몰려온답니다. 거기 교인이 말하길 온 지역에서 몰려오는 교인들을 보면 아름답다고 하더군요. 그 교회는 변두리로 이사 가려고 하지를 않아요. 인천제2교회도 그럴 것 같네요. “아멘. 목사님 잘 모르시겠지만 실제로 송도 신도시하고 연수동에 수 만 채 아파트 대단지가 있습니다. 고 가운데 3000평 땅이 나왔어요. 경매로 80억에 나온 거예요. 일부 장로님들이 그 쪽으로 가자고 말씀 했어요. 한 10년 전일 겁니다. 그 때 거기로 갔다면 지금 엄청난 교회가 됐을 겁니다. 송도 신도시가 엄청나고 연수동 수 만 채 아파트 단지 한 가운데이니까요. 많은 교인들이 가자고 했는데 최종적으로 장로님들을 설득해 가지 말자고 했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나중에 장로님들이 이유라도 좀 알자고 했어요. 내가 이유를 말씀 드릴 테니까 그 이유를 듣고 포기하는 것으로 하면 말씀 드리겠다고 했어요. 장로님들이 그렇게 하시겠다고 했어요. 아내랑 그 곳에 가봤더니 이미 작은 교회 개척교회 상가교회들이 많이 있더라고요. 그런 작은 교회들이 없다고 하면 가도 괜찮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교회들이 반경에 엄청나게 많은 데 이 대지를 팔고 거기 가서 큰 교회를 지어놓으면 교인 간에 수평이동이 생기고 작은 교회 개척 교회 상가 교회들이 엄청나게 타격을 받을 겁니다. 장로님들 아시지 않느냐 우리 교회가 나쁜 소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좋은 평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가 그곳으로 가면 우리는 엄청 큰 교회가 될 것이지만 주위에 많은 교회들이 말로 할 수 없는 피해를 볼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런 일을 하지 맙시다. 제가 연구하고 현장 조사를 한 걸 말씀 드리는 겁니다. 여기에서라도 오겠다는 교인만 받읍시다. 우리가 인천에서 제일 큰 교회가 된다고 해서 천국 가서 더 큰 면류관을 교인들이나 장로님들이 받는 건 아닙니다. 목사가 받는 것도 아닙니다. 인천에서 제일 큰 교회가 못 되더라도 여기서 오는 교인만 받고 거기 작은 교회들 살려줍시다. 그랬더니 이제 많이 얘기들이 있었습니다만 결국 장로님들이 제 말씀을 들어주셨어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저희 교회는 34년 된 아주 낡은 건물이었습니다. 여기다 새로운 건물을 짓자 해서 지금 이 교회를 건축하게 된 겁니다. 입당해서 5년 됐습니다. 그런데 이제 마음속에서는 제 나이로 보면 하나님께서 주신 마지막 기회였는데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결정하고 나서 그 땅 근처로 심방 가는 일이 생기면 가슴이 아려오면서 잘못했나 하는 자책이 생기는 겁니다. 이거 결정을 잘못 한 것이 아닌가 하는 후회와 아쉬움이 교차하는 겁니다. 6개월이 지나니 괜찮아지더군요.” -정말 잘 하신 일이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결정을 하신 거죠. “장로님들에게 감사하죠. 그분들이 저희 교회 제 선배님들이시고 주일학교 스승들이십니다. 그런데 제가 그분들에게 말씀을 드렸더니 목사님 말씀이 옳은 듯 하다고 교회 앞에 광고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다음 주 광고해도 될까요 물었더니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저희들이 목사님 말씀이라면 인정하고 따라야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다음 주 신도시로 안 간다고 광고하고 우리 교회에 오시는 분들만 받자고 했더니 교인들도 다 따라주는 겁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잘 한 일이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는 지금보다 더 젊었으니까 잘못 결정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하는 겁니다.” -그게 주님이나 사도들의 정신이 아니겠습니까. “결정을 하고 나니 그 땅값이 70억으로 내려오는 겁니다. 3000평이라는 땅이 학교도 안 되고 큰 식당도 안 되고 천상 교회 거예요. 그 유혹이 내 마음속에서 많은 투쟁을 일으켰습니다. 내 자신과 싸우는 거죠.” -제 생각에 교회는 가난한 사람이 많아야 된다고 봅니다. 그런 지역으로 가면 가난한 사람이 적어요. 병원에 환자가 많아야 하듯 교회에는 가난한 사람이 많아야죠. “(차를 한 모금 마시고 크게 웃었다.) 여기는 그냥 평범한 지역이라 제가 골프를 안 쳐요. 제가 미국 미시시피주 잭슨에 있는 리폼드신학교를 다녔는데 당시 환율이 1달러에 800원이었습니다. 그런데 5달러면 하루 종일 골프를 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 누구나 골프를 치는 겁니다. 그 당시 그곳에 노수길 집사님이라고 가발 사업을 하는 분이 계셨는데 골프를 치라고 골프채를 선물하더라고요. 그래 그 정성에 못 이겨 골프채를 그냥 놔둘 수도 없어서 미국에서 한 3년 골프를 쳤습니다. 금요일과 토요일 주말에 골프를 쳤습니다. 제가 잘 쳐요. 저희 교회에 와서 느낀 게 뭐냐 하면 여기서 골프 쳤다가는 귀족 중에 귀족이겠구나. 그래서 골프채를 버리고 오늘까지 동기들 후배들 골프 치자고 얼마나 전화가 오는지 모릅니다. 수원에 있는 모 목사님은 골프채를 하나 선물로 가져왔어요. 그가 이거 가져왔는데 내가 전도사입니다 말하는 거예요. 무슨 전도사냐고 했더니 골프전도사라는 겁니다(그가 누군지 아는지라 같이 웃었다). 내가 이 사람도 전도했고 저 사람도 전도했다고 해요. 그러면서 골프채를 받으라고 하는데 나는 안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한사코 받아 두시기만 하라는 겁니다. 제가 골프를 한 달만 치면 그 분들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교회에 여러 가지로 덕이 안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골프는 치지 않습니다. 은퇴하면 칠겁니다. 워낙 제가 운동을 좋아해 은퇴하면 잘 치겠죠. 이 지역을 생각하면 골프 친다 안 친다를 떠나 제가 섬기는 이 교회 교인 수준하고 안 맞습니다.” -신도시도 안 맞습니다. “(웃는다) 그래요.” -미국에서도 영적으로 사는 목사는 골프 안 칩니다. 이게 사실은 운동이 되질 않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골프는 점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근육을 단련하는 헬스클럽은 점수가 없어요. 이건 자기 혼자하고의 싸움이고 훈련인데 골프는 점수가 있어 반드시 내기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가난한 노인들도 몇 불이라도 걸거나 식사 내기라도 하더군요. 게임이라 경쟁심이 생겨요. 우리 목사들도 골프를 치면 내기를 합니다. 게다가 필드에서 목사라고 할 수 없으니까 교수니 박사니 하며 젊은 캐디들한테 정치인이나 기업인들처럼 농담 던지고 합니다. 무엇보다 골프는 목사에게 덕이 안 됩니다. 골프 전도사 필리핀 가서 뭐 하고 지내는지 잘 압니다. “잘 아시네요.” -그 전도사 주선으로 필리핀에 골프 약속들 잡아놓고 주일 예배 끝나면 골프채들 챙겨들고 공항에 모여 있는 모습 본 적 있습니다. 참으로 목사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다. 언제 우리 목사들이 돈이 많아졌다고 그러는 겁니까. 그거 영적인 성직자 목사들이 할 짓이 아닙니다. 사도 시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 구제는 집사를 뽑아 맡긴 건 아닙니까. 그처럼 목사도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 골프도 집사들에게 맡기는 건 성경적이 아니겠습니까. 건강이라는 게 사실 경건에 힘쓰면 더 건강해지는 거 아닙니까. “(쾌할하게 웃으며) 어쨌든 저는 제 자신 목회 현장이라든지 형편이 골프가 맞질 않습니다. 골프치는 다른 분들을 뭐라고 할 마음은 없습니다. 우리 교회 십일조 내시는 분들을 봐서 나는 골프를 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하실 수 있는데 안 하시는 건 굉장한 결단입니다. 그거 한번 빠지면 재미 탓에 못 빠져나옵니다. “정말 재미있긴 하죠.” -좋아하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잠언 16장 9절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목사가 ‘지혜자의 마음’을 가졌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이는 그가 목회나 설교에 탁월한 테크닉을 가졌다는 뜻이 아니다. 비범한 지성과 의지를 가졌다는 의미도 아니다. ‘마음’을 가졌다는 건 특별하고 고귀한 정신을 가졌다는 걸 의미한다. 그렇다. 이건영 목사의 경이로움은 그의 정신적 위대함에 있다. 지극히 평범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이뤄낸 위대함이라 더욱 값지다. 그는 세상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성경의 진리를 앎으로 얻은 자유인이었기 때문이다. 이건영 목사가 지난 2월 16일자 국민일보 인터뷰에서 행한 그의 자유로운 마음을 보여 주는 말 한마디를 소개한다. “교회가 마련한 공간과 시설들은 이용자의 대다수가 교회 외부 사람들이므로 그 공간에서 단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온기를 유지하는 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슬픔을 경유하지 않고 믿음의 바닥에 이를 수 없다. 성경은 말씀한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전도서 7:3-4 슬픔은 이웃의 아픔에 ‘나’를 겹쳐놓는 일이다. 슬픔을 “응시”할 때, ‘나’는 이웃에게로 건너가 이웃과 하나가 된다. 그리하여 슬픔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기나긴 미움”은 “막막한 슬픔” 앞에 무력하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권면한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갈라디아서 5:14 이건영 목사 이전이나 이후에도 위대한 설교자나 목회자는 많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을 깨우치고 실천하는 지혜자의 마음을 지닌 이건영 목사에게 목회 성공은 아무것도 아니다.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 목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알리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201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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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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